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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길 Jul 27. 2022

겨울밤은 참으로 희다

하얀 사랑

겨울밤은 참으로 희다. 까맣다 못해 더욱더 희다. 흰 고드름과 같은 차가움, 산에서 불어오는 하얀 눈꽃 바람, 냇가의 얼음이 울다 못해 차라리 더 희다. 그러고 보니 차가워서 희다기보다는 희고 하얀 것이 차가운 것 같다. 원래 눈이 올 때는 춥지 않다. 눈이 오고 나서야 추워지는 것 보면 역시 흰 것은 차가운가 보다. 저 하얀 달빛, 겨울에 보는 달이 더 외롭고 차갑게 다가오는 것은 너무 하얘서 더 차갑게 다가온다. 아마도 이별의 색깔이 있다면 하얀색이 아닐까 한다. 따스한 봄에는 헤어지는 일은 드물 것 같다. 모든 생명이 일어서고 감정도 따라 일어서서 굳이 마음이 상하여 헤어질 것 같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놈의 겨울, 혹자는 가을을 이별의 계절이라 노래하기는 하지만 아마도 이별의 쓴맛을 본 사람은 가을보다는 겨울이 이별을 이야기하기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꼭 이별해야 한다면, 낮에 일어날 것 같지 않다. 오후에 그것도 밤에, 낮에는 일해야 하기 때문이라도 마음은 있겠지만 실제로 행동으로 일어날 수 있는 시기는 밤이 더 많을 것 같다. 깜깜한 밤의 이별은 참 무서울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멀어져 가는 사람이 어둠 속으로 갇혀 가는 데에는 더 편리할 수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찬 겨울에 헤어져야 한다면, 하얀 백지장처럼 만들어 놓고 떠날 수 있다면, 서로 모두가 새로운 그림으로 채우기엔 더 나을 것 같다. 그래서 이왕 할 이별이면 하얀 밤에, 그것도 하얀 겨울의 밤이면 좀 나을 것 같다. 꼭, 눈이 와서 하얀 밤이 아니더래도 가로등이 꺼진 깜깜한 밤일지라도, 그것이 하얗게 빛이 날 수 있는 겨울의 밤 언저리이면 그렇게 무겁지 않은 걸음으로 서로의 길을 갈 수가 있을 것 같다.     


                                                      [겨울밤(싱가포르), 2020]

물론, 차가운 겨울밤이 흘리는 눈물은 더욱더 아플 수 있다. 그 짜릿한, 짭짤한 눈물이 입으로 들어올 때의 그 느낌 또한, 그 슬픔의 이유를 잘 말해 줄 수 있고, 마음을 다스리기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혹, 저 사람이 아니면 안 되겠다 싶다면, 얼굴에 얼어붙은 그 눈물 자국이 더욱 서로를 다 용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겨울의 이별은 그 여운이 좀 많이 남을 것 같기도 하다. 


굳이 이 차가운 겨울에 왜 이별 이야기는 해서, 더 따스한 사랑 이야기도 많을 터인데.     


겨울 사랑은 아마도 나누는 사랑이어야 할 것 같다. 몸에 꼭 끼워놓고 내놓지 않은 겨울 사랑은 더 추울 것 같고, 그 찬 겨울에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 같다. 그래서 오! 신이시여, 내가 사랑하는 그대가 꼭 나타나 주길 도와주시옵소서라는 주문을 외우기도 할 것이다. 겨울은 차갑지만, 그 속에서 일어나고 맺어지는 사랑은 아무리 강한 추위도 끊어 놓을 수 없다. 사랑이란 혼자서는 해결 못 해도 둘이 같이하는 사랑은 무슨 그리 추위가 대수이겠는가. 추운 바닷가를 거닐면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아이스크림이 차다는 생각보다는 참 달콤하다는 느낌이 더 닿아 오지 않을까.     


그래, 이왕이면 찬바람 부는 바닷가에서, 그믐달보다는 초승달이 내려 보고 있는 해변의 사랑이라면 누구라도 한번 해볼 만한 사랑이 아니겠냐고. 잠이 와서 졸고 있는 가로등은 이 커플들이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고, 출렁이는 파도는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뒤를 남기지 않게 연인들의 속삭임을 실어가 버릴 것이기에 무슨 말인들, 무슨 고운 말인들 못 하겠는가. 그래서 마음이 젊은 사랑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누구라도 하얗게 비치는 달빛을 머리 위에 얹고, 사랑하는 사람을 등에 업고 사박사박 해변의 모래 위를 걸어보라, 무엇이 이들을 가둘 것인가.     


그래서 겨울의 밤은 길다. 하얗게 쌓아진 방파제 위에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한마디씩만 한다고 해도 아마도 저 긴 밤은 하품할 것이다. 겨울 사랑은 참 고결하고도 숭고한 것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사랑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빠져들면 찾을 수 없는 길이기도 하겠지만 또한, 겨울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살아 있는 사랑을 할 수 있기에 우리에겐 겨울이 필요한 것 같다. 겨울은 용서의 의미도 함유하고 있지는 않을까, 꽝꽝 얼어붙은 육체의 고집으로 어떻게 마음을 녹여 용서될 수 있으련마는, 차고 깊은 계곡에서도 옹달샘같이 물이 솟아 모락모락 김을 내면서 목마른 사슴을 부르는 것과 같이 깜깜한 마음에서 한 가닥 물줄기가 흰 눈을 배경으로 흘러나올 때쯤이면 까맣게 탔던 숯덩이라도 흰 눈의 빛을 받아 차츰 회색으로, 흰색으로, 그다음 따스한 옹달샘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또한, 참으로 삼가야 할 일은 겨울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겨울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아무런 주관도 없이 엮어내는 말은 어떤 사람에겐 깊은 상처를 주는데도 본인은 책임지지 않는 사람으로 비칠 공산이 크다. 그래서 겨울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며, 겪어야 인간이 될 듯하다. 진심 어린 겨울은 사람을 더 단단하게 해주어 무슨 일에라도 자신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 겨울의 밤이 긴 이유는 깊이 빠져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봐야 더 따스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울밤을 하얗게 지새워볼 수 있다면, 나에게 다가오는 의미도 절대로 적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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