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처럼 즐겁게 야근을 하고 꿀잠을 자던 아침에 갑자기 아내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거실 컴퓨터가 먹통이 되었다는 것이다. 갑자기 웬일인지 궁금해져서 나가 보니 컴퓨터 로그인 이후에 화면에 아무것도 뜨지 않고 검정 화면에 마우스 커서만 움직이고 있었다.
보통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나의 첫 번째 반응은 마이크로소프트를 비난하는 것이다. 'I hate Microsoft with passion. They make the worst software in the world.' 라고 이야기하는 내 상사의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한 마음과 나의 마음은 별반 다르지 않다. 또 무슨 업데이트가 뻑 났군... 이렇게 생각하며 인터넷을 뒤져보고 있는데 예상외로 지난 24시간 이내에 폭발한 클레임들을 찾기 어려웠다.
두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거실 컴퓨터로 Roblox 를 열심히 하던 둘째 아이였다. 이 녀석 게임하다가 뭔가 이상한 링크를 클릭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며 바로 당분간 태블릿으로만 Roblox 를 하는 것으로 거실 컴퓨터 사용 금지 방침을 전달했다. 그는 매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재부팅을 여러 번 해도, 하드 리셋을 해 보아도 컴퓨터 상태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며 답답하게도 Task Manager 창조차 뜨지 않아 작동하는 프로세스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몇 없었고 그 중 하나인 F8 키를 누르며 안전 모드로 부팅하는 실험을 했는데...
정상 부팅이 되었고 그 순간 아내는 환호성을 지르며 손수 내린 커피와 A급 아침을 차려 주었다. 집에서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아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순간이다. 다시 Roblox 를 거실 컴퓨터에서 할 수 있게 된 둘째 아이는 '살다보니 너도 도움이 될 때가 있구나' 라는 느낌의 멍한 시선을 전달했다.
일단 급한 불을 끄고 나면 그 다음부터 원인은 중요치 않다. 아침의 소란을 뒤로 한 채 바로 출근해 일을 시작하던 찰나에, 지인 분으로부터 다음의 메세지를 전달 받았다.
1600만 명 쓰는 백신 '알약' 오류에 PC 먹통... 불만 속출 (hankookilbo.com)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 들며 문제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절대로 유료 소프트웨어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방침 하에 우리 집 컴퓨터들은 한결같이 '알약' 을 사용하고 있었다. 둘째가 Roblox를 플레이 하던 도중 알약 오류로 윈도우 내 기본 프로세스를 랜섬웨어로 잘못 인식 후 차단하면서 이런 문제가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직업병 때문인지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만화 'Dilbert' 에 나오는 아래의 그림이었다.
실수 없는 설계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다행히 난 설계 경험 중 아직까지 'Major Catastrophe'를 일으킬 만한 실수는 하지 않았다. 이는 기술자의 역량 외에도 상황과 운에 좌우되는 것이 크기에 나는 그저 아직까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알약 사태의 결과는 영향 받은 고객의 수와 영향력을 생각할 때 'Major Catastrophe'라고 생각된다. 해당 책임자와 개발 팀은 현재 엄청난 가시밭길을 걷고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매번 신 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내 실수가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릴 때가 많았다. 그리고 이는 내가 아이들에게 엔지니어의 길을 그다지 추천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본인이 정 하고 싶다면 말릴 수는 없겠지만 이런 일들을 언제든 겪을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해 주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만에 하나 직접 겪더라도 충격이 덜할 수 있을테니... 조속히 문제가 해결되고 사용자들의 피해가 최소화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