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알 수 없다
MZ 세대를 중심으로 N잡 열풍이 거세다. 더 이상 평생 직장이 없어진 사회, 월급만으로 먹고 살기 힘들어진 세상에서 당연한 현상이라고 본다. 수많은 일을 동시에 하면서 몇 배의 소득을 올릴 수 있다면, 나아가 일 하지 않아도 소득이 창출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출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 길에 도달하기까지 겪어야 하는 수 많은 시행 착오와 노력, 법적 제약 등등이 두려워 대다수의 직장인들은 중도에 포기하게 된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인 N잡을 위해 필수인 SNS 및 소셜 마케팅에 관심이 없고 지극히 내향적인 성향의 나로서는 넘쳐나는 N잡 성공기가 남 이야기처럼 느껴졌고 풀타임으로 소속된 현재의 직장과 병행하여 또 다른 일을 해 본다는 생각을 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육아에 찌들고 안정과 도전 사이에서 좀 더 '안정' 에 기울어졌던 탓이다.
2020년 전후로 시작된 코로나는 이러한 내 생활 방식을 바꾸어 버리는 큰 기폭제가 되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실직을 했고, 회사들은 정리해고 및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나는 직장을 잃지는 않았으나, 사업부의 수익성이 목표에 미치지 못한다는 경영진의 판단 하에 내가 속했던 팀은 공중분해 되었고 나만 남아 기존 비즈니스 유지 차원에서의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쉽게 말해 별다른 권한 없이 책임만 주어진 상황이었다. 내보내긴 아깝고 데리고 있자니 딱히 보낼 데도 없는, 나에 대한 회사의 평가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나의 은인인 전 매니저 또한 이 시기에 회사를 떠났다. 홀로 담당해야 할 고객은 듣기만 하면 모두 알 만한 대기업이었고 요구 사항이 만만치 않아 업무 스트레스가 급증했다. 을 포지션에서 갑을 상대하는 전투 스킬이 급 상승했던 돈 주고도 못 살 경험이지만,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던 찰나, 예전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현재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 자리가 났으니 지원해 볼 의향이 있냐는 것이었다. 대학원 생활은 제하더라도, 10년 이상 산업체에서만 일했던 내가 학교 강의에 도전하는 것이 쉬워 보이진 않았지만 당시의 내 마음은 지금 시점에서 서서히 말라죽느니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고 감사의 말과 함께 흔쾌히 도전해 보기로 했다.
첫 번째 어려움은 역시나 강의 경험이 없다는 것이었다. 신입사원을 뽑으면서 3년차 경력을 요구하는 현재의 취업시장과 마찬가지로, 학교 역시 3년의 강의 경력이 있는 검증된 사람을 원하고 있었다. 이전 회사에서 해 왔던 고객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 및 튜토리얼 등등의 경험으로 어떻게든 포장을 했지만 내 스펙이 딸린다는 것은 이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수 차례 경험들을 통해 어차피 취업은 운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생각없이 지원하고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예상대로 결과는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코로나 사태로 학생 수가 급감하여 학과 구조조정 및 Hiring Freeze에 들어갔고, 내 전공 분야는 현 상태에서 그들의 관심 분야가 아니어서 어렵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여기나 저기나 고통받는 상황을 보며 지상 어디에나 낙원은 없다는 교훈을 다시금 상기하게 되었다. 어차피 준비해 본 거, 다른 학교들 비슷한 분야 오프닝에 지원이라도 해 보자라는 생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지원서를 넣었다. 물론 근처에 있는 다른 회사들도 같이. 역시나 생각 없이 그냥 하는 것이 포인트다.
예기치 못하게 두 학교 및 한 회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첫 번째 학교는 현 시점에서 내가 가진 스펙으로 가기 힘든 학교였고 두 번째 학교는 시골 지역이어서 일하러 간다는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은 학교였다. 연락 온 회사의 경우 집에서 단 5분만에 출퇴근이 가능한 꿈의 직장이었다. 인터뷰 당시에도 왜 여기에 지원했냐는 말에 '가까우니까' 라고 솔직히 얘기했으며 매니저 역시 그래서 나에게 연락을 했다고 말했다. 이 두 가지 기회 중 하나라도 잡을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 같았다. 이 인터뷰 과정들은 꽤 재미있어서 차후에 더 기술할 예정이다.
예상대로 또 다시 결과는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최종 인터뷰 후보까지 갔던 첫 번째 학교는 코로나 사태로 Hiring Freeze가 걸렸고, 모든 채용 절차가 취소되었으며 매니저가 구두 오퍼를 준 집 앞 회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채용이 중단되었다. 현실은 늘 기대한 것 그 이상이다. 남은 것은 시골 지역에 위치한 두 번째 학교. 당시 직장에 남아 몇 년간 더 소모품으로써 경력에 상관없는 일을 하며 안주할 지, 해 보지 않았던 일을 한 번이라도 시작해 볼 것인지의 결단의 순간에서 가족의 도움으로 나는 두 번째 학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때만 하더라도, 나는 이 시점이 내 삶에서 큰 분기점이 되리란 것을 알지 못했다. 오퍼를 승낙하고 다니던 회사에 상황을 이야기를 하고 그만둘 각오를 했을 때, 새로 나의 매니저가 된 분은 나의 결정을 승낙할테니 어떤 형태로든 회사에 남아 계속 프로젝트를 도와 달라고 했다. 팀이 공중분해 되면서 악명 높은 해당 고객을 상대했던 경험과 설계 기술이 있는 사람은 나 뿐이었으므로 윗 선과 이야기 하여 내가 겸직을 하는 것을 허용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역시 사람은 스스로 힘든 일 하기를 싫어한다. 지금껏 회사에 대해 을 포지션이었던 내가 갑자기 갑의 위치로 뒤바뀌며, 상황에 떠밀려진 투잡러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별 쓸모 없는 사람이어서 남겨두었던 계륵이 갑자기 칼자루를 쥐게 되는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회사 일과 학교 강의를 병행하는 것은 초기에 생각보다 더 많은 노력을 요구했다. 학교는 미 동부에, 회사는 미 서부에 위치했으므로 대략 세 시간의 시간차가 있었다. 양 쪽의 일정을 소화하려면, 하루를 세 시간 일찍 시작해야 했고 저녁에 두 시간 정도를 더 일하는 데 써야 했다. 다만 이렇게 2 년이 지나자 컨텐츠와 노하우가 생겼고, 차츰 몸과 정신이 일정에 맞게 자연스레 맞추어지게 되었다. 이 경험을 통해 처음으로 나는 겸직이라는 것이 일단 습관이 되면, 평범한 사람에게도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재택 근무 및 강의가 정착된 것 또한 이 변화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요인이다. 이후 이직과 함께 풀타임 학교 일을 파트타임으로 전환하면서 다시 회사 일의 비중을 늘였지만 학교 관련 일은 여전히 재미있고 파트타임이기에 필요에 따라 다른 곳에서 자유롭게 강의를 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겸직이란 것이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초기 1-2년 동안은 일을 배우면서 소득원을 안정화시키는 기간이므로 업무량이 폭증할 수 있고, 파트타임 겸직을 통한 수익 또한 풀타임 본업을 능가할 수준은 아니므로 우선 본업에 충실해야만 한다. 다만, 겸직을 통해 얻는 가치는 한 사람의 자유인으로서 스스로 더욱 당당해지는 데에 있는 것 같다. 기존의 본업 외에 부가적으로 획득한 기술 및 수입원이 있으므로 실직과 같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마음이 흔들리는 정도가 줄어들고, 필요한 상황에서 할 말을 하게 만드는 당당한 마음가짐을 갖게 한다. 또한 이후 이직 시에도 매니저와 상의 후 조율한다면 계속 겸직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디지털 사회는 생활의 편리함과 시간 단축이라는 이점을 선물해 주지만, 그물같이 짜여 진 디지털 사회 망 안에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온전한 자유는 이전에 비해 줄어들었음을 느낀다. 자신을 둘러 싼 기대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유롭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N 잡 열풍은 계속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특별한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며,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도 예기치 않게 다가올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