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 이야기
2017년, 직장을 다닐 때의 일이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 재미있어 휴가를 보낼 생각은 하지 않았고 그렇게 연차가 쌓여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회사의 방침 상 연차를 소진하지 않은 직원들에게 별도의 보상은 주어지지 않고 소멸되니 부지런히 연차를 소진하라는 지침이 떨어졌다. 그래서 마지못해 연차를 소진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 큰 고민할 것도 없이 일본 오사카 여행을 하기로 했다. 거창하게 다녀오기보다 캐주얼하게 편히 다녀오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비행기 티켓을 사고 값싼 유스호스텔을 예약했을 뿐 별다른 계획은 없이 배낭 하나만 들고 오사카로 떠났다.
우동집, 이자카야, 도톤보리 등을 정처 없이 걸어 다녔고 오사카성을 돌아보았다. 깨끗하고 관광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는 일본은 여행하기 좋은 곳이지만 금세 흥미가 떨어졌다. 오래 걸은 탓에 피곤하기도 해서 일단 숙소로 돌아와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며 저녁에 할 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재즈클럽에 가는 것이었다. 바로 검색을 시작했고 걸어서 갈 만한 거리에 작은 재즈클럽이 있었고 마침 그날 저녁에 공연도 잡혀 있었다. 다음 스케줄도 정해졌겠다. 시간도 충분하겠다 숙소에서 편히 쉬다 시간 맞춰 나가려고 마음먹었는데 로비에 혼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여성분이 눈에 띄었다.
나의 내수용 자아는 매우 내성적이지만 해외용 자아는 비교적 외향적이다. 재즈클럽에 가기로 마음먹었으니 동행이 있으면 왠지 더 즐거울 것 같아.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한국인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한국분이세요?” 하니,
“네 안녕하세요. 한국인 맞아요.” 하며 약간은 경계하는 모습으로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나는 저녁에 나가기 전에 쉬고 있는데 한국사람이 혼자 온 것 같아 말을 걸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조금 경계하고 귀찮아 하는 듯싶더니 금방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전라남도 광주시청의 공무원이라고 했다. 최근까지 일이 너무 많아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고 일터와 집만을 오가는 삶에 지쳐 있을 때 팀장님이 ‘너 이러다 큰일 나겠다. 휴가 써서 어디라도 다녀와라.’ 고 해서 가까운 일본에 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 지쳐 있어서 활기찬 거리를 돌아다녀도 그리 즐겁지 않다고 했다. 차라리 숙소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게 나을 것 같아 들어왔다고 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나도 더 이상 방해하고 싶지 않아 대화를 마무리하며 제안했다.
“저녁에 재즈클럽에 가서 라이브 음악을 들으러 갈 거예요. 혹시 생각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같이 가요.” 그녀는,
“아뇨, 저는 그냥 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많이 지쳐있는 것 같아 더 이상 재촉하지는 않았다. 나도 그녀에게 여성으로서 호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여행지에 오면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려는 을 좋아하기도 했고 처음 가는 곳을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도 좋아해서 말을 걸었던 것이어서 굳이 오해를 사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좀 쉬겠다며 방으로 들어갔고 나도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몇 시간이 지나 슬슬 출발하려 로비를 지나는데 다시 그녀와 마주쳤다. 나는 웃으며 다시 한번 물었다.
“저 지금 나가는데 같이 안 가실래요?”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쉬는 동안 지루하기도 했을 것이고 일본까지 와서 재즈공연을 본다는 것이 그리 흔한 경험은 아니라 여러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외국에서 만난 낯선 남자와 단 둘이 동행하는 것이 불안했을 것이다. 나는,
“뭐가 걱정인지 알 듯도 해요. 전 그냥 혼자 가는 것보다 같이 보면 더 즐거울 것 같고 아까 이야기 들어보니 00 씨에게도 좋을 것 같아서 얘기하는 거예요. 스트레스 풀러 온 거잖아요. 딴생각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그 말에 안심한 듯했다. 간단히 준비를 하고 오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나는 오사카 유스호스텔에서 처음 만나 사람과 재즈클럽으로 향했다.
클럽은 의외로 어느 건물의 7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간판도 눈에 잘 띄지 않아 건물을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와서 찾아야 했다. 그렇게 클럽을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스터가 우리를 맞았다. 마스터는 콧수염을 길렀지만 비교적 젊은, 깔끔한 셔츠에 보타이, 베스트를 입고 있었다. 역시 일본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인 둘이 들어오니 조금 놀라는 듯했다. 그는 영어에 매우 서툴렀고 간신히 한국인이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오게 되었는지 물었다. 나는 음악이 듣고 싶어 구글 검색을 했다고 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기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위스키 한 잔을 주문하며 자리를 잡았고 그녀는 아마도 탄산음료를 주문했던 듯하다.
관객은 역시 많지 않았다. 퇴근하고 온 듯 바바리코트를 입은 부장님 같은 아저씨 한 분, 밴드의 가족으로 보이는 중년 부부, 그 외에 혼자 온 듯한 두어 명과 우리가 전부였다. 천고는 낮고 나무로 된 테이블과 의자는 수수했지만 어쩐지 내공이 느껴지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편하게 와서 음악을 즐길 수 있지만 수준은 높을 것 같은 기대감을 주었다.
밴드는 색소폰, 피아노, 베이스로 구성된 트리오였는데 그 중 색소폰 연주자는 여성이었다. 재즈에서 관악기 파트를 여성이 담당하는 경우를 잘 보지 못했는데 일본에서 처음 접한 밴드의 색소폰 연주자가 여성이라니 참 귀한 경험을 하게 됐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는 밴드의 리더로 보였다. 음악은 훌륭했다. 재즈 공연을 자주 보러 다니지는 않지만 한국에서는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본에서 만난 밴드가, 게다가 단촐한 구성의 젊은 연주자들이 이렇게 수준 높은 연주를 들려줘서 기분이 좋았다. 옆에 앉은 그녀에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녀의 얼굴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음악이 아주 좋다고 했고 분위기도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공연이 끝나고 멤버들이 관객들과 인사를 나눴다. 우리도 박수를 치며 공연 잘 봤다고 인사를 하는데 마스터가 멤버들에게 가서 우리를 가리키며 뭐라 말을 걸었다. 그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다시 다가와 한국에서 온 것이 신기하다며 말을 걸었다. 리더인 듯한 여성 색소폰 연주자는 유럽에서 유학을 해서인지 영어를 제법 잘 구사했다.
나는 연주가 아주 좋았다고 칭찬했고 그녀는 웃으며 감사했다. 일본인들의 진심은 잘 알기 어렵다고 한다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연주는 좋았고, 비록 미리 알고 온 것은 아니지만 타국에서 자신들의 공연을 보러 와 준 관객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무엇보다 함께 한 공무원 선생님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진 것이 좋았다. 일면식도 없었고 나중에 만날 일도 없는 스쳐지나가는 인연이지만 때로 그런 만남이 오래 기억에 남고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