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직장 생활 실패기
- "….여보세요, 저 실패 건설, 실패자인데요."
- "에? 뭐요?"
- "저 실패건설, 실패...자..."
- "아 예 무슨 일이시죠?"
- "어, 제가... 그 자료를 받아야, 어... 보내주시기로 한 그…."
- "아, 뭐라는 거야?"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하며 날 괴롭힌 것은 새벽 6시의 출근시간도, 해님과 함께 움직이는 쳇바퀴도, 끝없는 구박도, 넘치는 보고서도 아닌 전화 걸고 받기였다.
나는 입사하고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사무실 전화기를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수화기를 들고서 말하는 ‘실패건설 실패자입니다’라는 한 마디가 그토록 무거울 줄은 몰랐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중남미 사람들의 사투리 섞인 영어처럼 알아듣기 힘들었고, 머릿속으로 생각한 말들은 목구멍에 대롱대롱 걸려 입 밖으로 나갈 생각을 못했다. 나는 그렇게 실어증 환자가 되었다.
누군가 내 통화를 듣고 나를 평가할 것 같은 두려움이 마음 속에 있었고, 전화를 하며 하는 실수들을 잡아내기 위한 어두운 그림자들이 등 뒤에 있는 것만 같아 두려웠다. 하지만 내 두려움을 비웃기라도 하듯, 내 전화기는 끊임없이 울렸다.
나는 수화기를 상대로 생존하기 위한 작전을 짜야만 했다.
첫 번째 작전: 온라인 세상으로 들어가기
“메일로 주세요. 아니면 문자로 주시겠어요?” 내가 처음 선택한 방법은 문자와 메일로 받는 것이었다. 메일과 문자로 온 내용은 천천히 읽어볼 수 있었고, 때문에 실수할 확률도 낮았다. 가장 좋은 점은 짧고 굵게 통화를 끝낼 수 있다는 것. 그 누구도 나의 통화내용을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의 메일함과 문자함은 활자들로 가득해졌지만, 그로 인해 새로운 실수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말 한마디면 끝날 일을 빙글빙글 돌려서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나와 메일의 짧은 동거는 끝이 났다.
두 번째 작전: 세상 밖으로 나가기.
나는 천재였다. (사실 세상에서 제일 등신이었다.) 나는 모든 통화를 사무실 전화가 아닌 내 휴대폰으로 돌려버렸다. 전화벨이 울리면 잽싸게 사무실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자연스러운 대화, 여유만만한 제스처, 그리고 가벼운 농담까지. 사무실 자리만 아니라면 나는 천하무적이니까.
복도에서의 나는 더 이상 실어증 환자가 아니었다. 사무실이라는 세상 속에서 짓눌리던 나의 자신감은 세상 밖으로 나가며 점점 살아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는 수화기 너머 상대방에게 당당히 내 이름을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작전에도 한계가 있었다.
우선 사무실에 막내의 전화를 받아줄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있던 사무실에서는 그랬다. 내가 통화하러 간 사이 내 사무실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하면, 내 상사들의 인내심은 사라지게 된다. "얘 대체 어디 간거야?" 이처럼 욕 듣기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더 이상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게다가 계속 밖으로 나가기엔 전화가 너무 많이 왔다. 도대체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네, 넵, 넹, 네네, 네네넹’ 밖에 없는 넵병 환자인 나를 하루에 수십 번씩 찾는 사람들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점점 세상 밖으로 나가기 귀찮아졌다.
결국 정공법
이 모든 과정을 거쳐 결국, 나는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아야 했다. 용기를 내서 나는 전화를 받기 시작했다.
“에..”, “예 실패자입니다, 실패건설..”, “에, 실패건설 실패자..”
결국 나는 성공했다. “네 실패건설 실패자입니다” 깔끔했고, 멋있었다.
몇 번 실패하다 보니 내가 말을 할 때 저지르는 어려운 말들도 점점 파악이 되었다. 반복 경험을 하고나니 학습이 되어 고쳐졌다. 그렇게 나는 사무실이라는 세상 속에서 전화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사무실에서의 전화가 익숙해질 무렵, 내 시야가 넓어졌다. 그때 바라본 사무실 속 세상에는 나에게 관심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결국 3년이 넘는 직장생활 속에서 멍청하게 전화를 하며 얻은 깨달음은
누구와도 전화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아닌, 아무도 내게 큰 관심이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개이득'이겠다.
*추신
사실, 처음 직장생활을 하며 갖게 되는 두려움의 대부분은 '실패하면 어쩌지?' 싶은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전화를 받기 싫었던 것도 다른 사람에게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나랑 통화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이xx 뭐지?' 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라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