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음이 필요할 때
어느 해인가 우리 반에는 친구와 어울리는 것이 무척 어려운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를 재민이라고 부르겠다.) 어떤 것이든 자신이 꼭 이겨야 하고 잘 알고 있어야 하고 ‘1등’이 되어야만 하는 아이였다.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는 무시무시한 말을 쏟아내고, 곧바로 주먹이 나가고 발이 나가는 재민이. 어떤 때는 주변에 있던 놀잇감을 주워 던지는 통에 늘 재민이가 친구와 놀이를 하고 있노라면 다른 아이의 놀이를 지원하다가도 재민이 쪽으로 촉을 곤두세워야 했다. 물론 초등학교 이전의 아이들이 어린것은 맞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어느 연령이나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며, 더구나 기관에서 가장 높은 연령인 7세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날도 꽤나 애를 먹이고 있었다. 그때는 아이들이 딱지치기에 큰 흥미를 느껴 삼삼오오 모여 딱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딱지를 치는 와중에 두꺼운 종이, 얇은 종이에 따른 특성이나 딱지의 크기에 따른 결과, 힘 조절, 목적물에 정확하게 맞추기 등을 몸소 배워가고 있었다. 저마다 집에서 부모님들, 조부모님들과 옛 추억을 되살리며 가족놀이문화가 활성화 됐는지 다양한 딱지들이 즐비해졌다. 등원할 때마다 쇼핑백 한가득 딱지를 접어 가지고 기세등등하게 오늘을 기대하며 오는 아이들이었다. 이로 인해 종이의 낭비를 생각해 보고 종이는 어떻게 만들어지며 나무가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하면 나무를 보존할 수 있을지로 생각이 모이고 흘러갔다. 그래서 우리 반이 정한 약속은 딱지는 더 이상 접지 않고 필요할 땐 친구에게 빌려 사용하고 갚는 것이 되었다. 재민이도 열 띄게 딱지치기를 하며 놀았는데, 재민이만은 우리 반의 약속을 지키기 어려워했다. 딱지가 많으면 ‘딱지왕’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딱지를 모으는 과정에서 다른 친구들의 딱지를 모두 땄기 때문에, 딱지치기 실력이 좋아서 많은 딱지를 갖게 된다는 개념은 터득하기 어려워했다. 교사인 내가 놀이에 참여해서 친구들에게 딱지를 빌리고 친구들의 딱지를 따면서 갚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주어도 소용이 없었다. ‘빌리다’, ‘갚다’의 단어 개념이 습득되기 어려운 것일까? 아니면 본인의 딱지를 잃은 것이 속상해서 알고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속상한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사회적 약속을 지키고 놀이규칙에 따라 놀이하는 것이 사회적 기술이기에 나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공정함이라는 개념이 공고해지는 7살 아이들 또한 그렇게 규칙을 어기는 친구와는 같이 놀기 꺼려하기도 했다. 그러니 그 아이를 위해서도 우리 반 어린이들을 위해서도 그랬다. 친구들과 딱지치기를 하면 재민이는 또 규칙을 어기기 시작했다. 모든 건 본인이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같이 노는 아이들이 어떻게 그 상황을 대처하는지 보려고 조금 더 기다려 보았다. 아이들은 아무 말 없이 딱지치기를 이어나갔다.
‘거절하거나 둘이서 재민이에게 뭐라고 하면 또 무섭게 굴까 봐 그러나? 왜 아무 대응을 하지 않을까?’
아이들의 표정을 살펴도 사뭇 진지해 보일 뿐 마음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개입했다.
“재민아, 그런데 그렇게 하면 친구들이 불편해할 것 같은데?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
뒤이어 들리는 목소리는 재민이가 아니었다.
같이 놀고 있던 친구 중 한 아이가
“우린 괜찮은데요? 그치? 수철아?”
“네 맞아요! 우린 괜찮아요! 재밌기만 한대요 뭘. 재민이가 그렇게 해도 괜찮아요.”
나는 순간 얼얼한 기분이었다. 나름의 경력과 나름의 교육적 판단으로 아이들에게 어떤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만의 착각 같았다.
아이들은 연령이 어릴수록 규칙은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규칙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못 지켰을 시 응당한 벌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사회적 구성원이 합의한다면 규칙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간다. 그래서 7세 연령이 되면 규칙이 있는 게임들을 즐기고 나아가 자신들의 흥미 요소를 반영하며 친구들과 협의 하에 놀이 방법이나 규칙을 바꾼다. 생각해 보니 우리 어릴 때는 ‘깍두기’라는 존재가 있었다. 나보다 나이 많은 형님들과 놀면서 아무래도 잘 못하는 나는 깍두기가 되어 잘 못해도 끼워주고 용서받고 이해를 얻었다. 그렇게 포용과 허용 속에서 함께 어울릴 수 있었다. 내가 감히 아이들에게 내렸던 교육적 판단 속엔 포용과 허용은 부족했던 거 같다. 단지, 일대 다수를 놓고 옳고 그름만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해를 받고, 사랑을 받은 아이는 다시 다른 이에게 이해와 사랑을 줄 것이다. 예전 우리의 놀이에서 ‘깍두기’의 존재가 대물림되었던 것처럼. 나보다 약한 상대를 이해하고 포용하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