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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감과 단호함 사이

어린이 훈육

by 하얀




어린이들을 훈육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서점에 가면 훈육에 관한 양육서들이 정말 많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잘 길러낼 수 있도록 오은영박사를 비롯한 여러 박사들이 TV쇼에 나와 문제행동 상황을 보고 여러 방법들을 제안한다. 그렇게 방송되고, 펴내지는 책, 육아 블로그 등의 수만 보더라도 아이를 잘 길러내고 싶은 보호자들은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 노력과는 반대로 노키즈존과 딩크족이 늘어나고 있다. 물론 딩크족은 경제적인 이유나 다른 이유가 있기도 하지만.



어린이들은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권리를 가졌지만 미성숙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을 대할 때 후자에 초점을 맞추고 대하는 것 같다.

미성숙하니까 도와주고 해주어야 한다고. 이렇게만 생각하면 아이들의 스스로 해 볼 의지도, 능력도 발달하지 않는 문제를 고려해 볼 수 있겠다. (자조능력이 부족해서 벌어지는 일은 이전 글에서 찾아볼 수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배제하겠다.) 하지만 차라리 도와주고 해주는 게 더 나은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바로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과 단호함을 구부하지 못하는 성인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몇 해 전인가 ‘단호박’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무엇인가를 부탁했을 때 끝까지 거절하는 사람에게 붙여지는 별명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끝까지 거절하는 ‘단호함’을 비슷한 단어인 ‘단호박’으로 대체해서 썼던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단호하게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바로 훈육이다. 그런데 이 ‘단호함’을 공포감과 혼동해서 사용하는 것 같다.

‘하지 마~’, ‘아니야~’라고 부드럽게 이야기하다가 결국은 큰 소리를 내고 엄포를 놓는다.


“박지민! 그러지 말라고 했지!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넌 여기 있어! 먼저 갈 거야!” 혹은 “그만하고 했지! 하나! 둘! 셋! 너 이리 와!”, “한 번만 더 그러면 진~짜 혼난다!”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면 하루에도 10번은 넘게 참을 인자를 세길 일이 많은 건 사실이다. 매번 우유를 엎지르고, 손을 씻으면 옷이 다 젖고, 친구 것을 뺏고, 정성껏 마련한 식사를 뱉어내고, 집어던지고, 모든 상황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다 큰 내가 되어 봤을 때 답답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 때로는 화도 난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그냥 모르고 서툴기 때문이다. 다그치고 재촉한다고 하루아침에 달라질 일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컴퓨터가 아니기에 입력하면 출력되지 않는다. 다 큰 우리도 다른 나라 말을 배우거나 새로운 운동을 배울 때면 3번 이상은 반복해야 잘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보통이니까. 이제 막 걷고 달리고, 뛰기 시작한 아이들인데 무엇을 그렇게 바랄 수 있을까.

그러니 화나는 감정은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미 아이들은 자신보다 몸집이 크고 나이가 많은 성인을 무서워한다.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아도 또래 친구가 곁에 왔을 때와는 다르게 긴장하는 걸 볼 수 있다. 성인이 한 번에 해내지 못하면 “어? 어른인데 못해요? 몰라요?”하면서도 또래가 못하면 그러려니 하는 걸 보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성인은 일단 권위가 있다. 이런 성인이 아이가 실수할 때마다 호통을 친다면 아이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부드러운 어투를 사용하면 되는 걸까? 몇몇 어른들은 아이에게 통사정을 한다. 아이는 점점 더 크게 울거나 자지러진다. 통사정을 하다가 안되면 결국 아이의 뜻대로 들어주고 결론지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사실 아이한테는 무섭게 하는 것보다 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이에게 자신이 화를 내고 소리 지르고 울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는 악순환의 신념이 굳어질 뿐이다. 이로써 보호자는 더욱 힘들어지고 사회적인 규범을 따르지 않는 아이들이 많아지니 사회는 아이들을 거부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싶다. 차라리 결국 들어줄 일이라면 아이가 좋은 말로 부탁했을 때 들어주는 편이 훨씬 아이의 긍정적인 정서와 습관 형성에 도움이 될 것이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에 의해 좌우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교육기관에서 일하다 보면 교사가 누구냐에 개의치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을 찾아서 잘 생활해 가는 적응력 뛰어난 어린이들을 볼 때가 있다. 이런 어린이들의 보호자를 보면 대부분 밀당을 잘하는 보호자가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일들로 당길 때는 확실히 당기고, 안 되는 것을 가르칠 때는 끝까지 안 되는 것을 말해주고 보여준다. 보여준다는 건, 아이가 어릴수록 보호자 역시 안 되는 것은 잘 지켜서 몸소 보여준다는 것이다. (간혹 아이들과 교통안전교육을 할 때 ‘노란 신호등’의 의미를 물으면 “빨리 가라는 거예요”라고 답할 때가 있다. 무슨 상황인지 그려지나요?) 화를 내서 말을 듣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친절하지만 끝까지 거절하는 단호함. 그렇게 만들어진 허용과 제한의 울타리는 견고해져서 아이는 울타리 안에서 자유롭게, 세상의 따뜻함을 느끼며 자라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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