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맺기(어른)
보통 교사들은 새 학년을 준비하면서 많은 일거리들, 서류더미 사이 기대감과 설렘 또는 두려움이란 감정이 차오른다.
우리 반엔 어떤 아이들이 찾아올까 올해도 무사히, 감사히 보낼 수 있을까. 쌓인 서류더미 속에서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으로 보내주는 ‘개인조사서’를 꼼꼼히 살펴본다.
이 어린이가 좋아하는 것은 뭐지? 가정에서는 어떻게 지내던 어린이일까? 아~ 이렇게 지내던 어린이니까 처음엔 이런 도움을 주면 편안해하겠네.
때로는 입학 전에 기관에 초대해서 아이는 환경적응을, 부모는 우리 아이가 지낼 시설도 둘러보고 담임교사와 아이에 대한 정보도 공유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렇게 유치원이, 어린이집이 편안하고 즐거운 곳이라는 것을 인식시켜 준다. 교사로서, 먼저 살아본 어른으로서 조금 덜 산 어린이들을 위한 작은 배려이자 첫 관계 맺기를 위한 디딤돌이다.
아무래도 교사로서, 어른으로서 다양한 상황을 겪어봤고, 그에 맞게 적절하게 행동해야 하는 방법을 더 잘 아니까.
그런데 아이들과 오래 지내다 보니 교사들만, 어른들만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선생님들마다 교육방식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특히 교과서가 있지 않은 유아교사들은 천 명의 교사라면 천 가지 교육과정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유아교육은 기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가 수업이 시작된다. 인사를 나누는 법, 신발을 정리하는 법, 옷이나 가방을 정리하는 법 등등 하나부터 열 가지 천천히 알려줘야 할 것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여긴 나만 쓰는 공간이 아니니 내 자리를 찾아내기 위해서 여러 얼굴 사진 중에 내 자리를 찾고 기억하고, 내 이름을 찾고 기억하기를 반복한다. 그러면서 내 물건에 대한 책임감도 길러진다. -그렇기에 유아교사들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낼 때까지 기다려준다- 이런 기본적인 것들 외에 교사가 반을 운영하는 방식에 따라 정리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 반에 아이들이 많으면 교실 밖으로 나가는 횟수를 줄이는 것이 학기 초에는 용이하므로 물통은 교실로 들어온다. 그러면 요즘같이 개인 물통을 쓰는 경우에는 아침에 오면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어 교사가 정해준 위치에 물통을 정리해야 한다. 5살, 6살, 7살 같은 기관을 다녔다 하더라도 교사에 따라 물통을 놓는 위치도 달라진다. 아이들이 정리하기 쉬운 동선으로 배치를 하는 교사가 있을 수도 있고, 놀이 중에 수시로 물 마시기 편한 위치에 배치할 수도 있다. 이런 크고 작은 방식들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작년 선생님, 올해 선생님에 따라 아이들도 적응해 간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한 선생님이 방과 후과정반(종일반) 교사로 새로 오셨는데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었다. 7살 어린이들을 맡으셨고 선생님은 초등학교 가기 전 줄넘기를 가르쳐 주고 싶어 하셨다. 그분의 가르치는 방식은 매우 엄격하셨다. 흔히 떠올리는 유아교사 이미지와는 다르게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 만났던 교사들처럼 말투에도 힘이 느껴졌다. 특히나 그 반 아이들은 오전 교육과정반(반일반) 담임 선생님이 매우 허용적인 타입이라 안전하기만 하다면 무엇이든 허용이 되는 상황에서 지내고 있었다. 교육과정반에서는 어느 교실보다 아이들 소리가 크고 때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하고 싶은 것을 요구하던 아이들이 방과후과정 교실로 가면 세상 조용한 아이들로 변했다. A에서 시작하면 Z로 이야기가 끝나는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은 아이마저도. 조용히 먹자고 일러줘도 끊임없이 하고 싶은 말이 생기는 아이들인데, ‘다 먹었어요~’, ‘이거 안 잘라져요’, ‘더 주세요.’ 소리조차도 거의 안 들렸다. 목소리 톤조차 달랐다. 똑같이 ’ 우리 이렇게 할 수 있겠지요?‘라고 물으면 교육과정반에서는 교실 떠나가라 “네!!!!!” 외치던 아이들이 방과후과정반에서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네…”하고 답했다. 아니나 다를까 줄넘기를 가르치시는데 정말 강한 힘으로 몰아붙이듯 가르치시는 게 아닌가. 나는 몸으로 하는 것을 잘 못하기 때문에 - 춤, 운동 - 그 줄넘기를 배우고 있었다면 지금 생각해도 매일 같이 울었을 것 같다. 잘하고 싶은데 생각처럼 몸이 안 따를 수 있는 거니까.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걱정됐다. 괜찮을까 우리 아이들? 내가 보호해 주어야 하는 부분은 없나? 아이들이 침해받는 권리도 있을 거 같은데. 실제로 다른 선생님들의 만류도 있었고, 부모님들의 항의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은 줄넘기를 잘하게 되었고, 힘겨워 보이던 아이들이 이제는 바깥놀이에 나가도 줄넘기를 가지고 나가겠다고 했다. 여름방학이면 아이들이 ‘선생님 줄넘기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자발적으로 놀이시간의 일부를 활용해 색종이에 편지를 적기도 했다. 정말 아이들은 괜찮았을까? 어쩌다 그 반 아이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이후에 그 선생님과 일과를 보내야 하는데, 나랑 했던 놀이가 좋았던 아이들은 계속하고 싶다고 졸랐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며 아쉬운 마음에 공감해 주었다. 그리곤 방과후과정반에 가서 해도 괜찮은지 여쭈어보고 놀이하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날 아이들의 그 놀이는 거기서 끝이 났다.
“아~ 그런데 못할 거 같아. 000 선생님은 안된다고 하실 거 같아” 아이들의 말이었다. 혹시나 싶어 여러 질문들은 빙빙 돌리며 “00반 선생님은 어때?”, “그럼 **반 선생님은?”, ”그 선생님과는 어떤 놀이할 때 제일 좋아? “라고 연거푸 물었다. 그때마다 아이들의 대답은 ”좋아요! “ 라며 그 선생님 마저 좋다고 하는 것이다. 의아했지만 다른 질문을 계속해봐도 아이들은 진심이었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우린 모두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려한 부분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그에 맞게 잘 적응해 갔다. 물론 초기에 무섭다고 느끼고 해내기 힘들어하는 어린이들도 있었지만 잘하게 되었을 때는 누구보다 기뻐했고 자신감을 얻기도 했다. 그 후에도 아이들은 학기를 마칠 때까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답하며 하고 싶은 욕구를 다 말하긴 어려워했지만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선생님의 가르치는 방식을 선호하거나 두둔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모든 것에 일장일단이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우리 아이들은 여러 가지 색을 지닌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웠으리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