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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가 보는 세상

동화와 자기 중심성 그 사이

by 하얀



내가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하던 시절 교수님께서 들려주신 아이들과의 에피소드는 내 마음을 움직였다. 나도 꼭 저런 교육을 실현하겠노라고 다짐했던 순간이다.

교수님이 원감님으로 부속 유치원에 근무하던 시절 7살 반 아이들에게 떠들썩하고 신나는 날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낡은 적목 블록을 새것으로 바꿔 주려고 새 적목 블록이 유치원 복도에 들어왔고 아이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대단히 궁금해했다. 작은 변화에도 크게 일렁이는 아이들이니 얼마나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았을까. 교사는 새 적목이라고 알려주며 아이들의 관심을 놓치지 않고 헌 적목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이들과 의논하셨다고 한다. 아이들은 헌 적목도 새 적목처럼 고쳐주자고 했단다. 그래서 근처 목공소와 페이트 가게에 방문해서 가게 사장님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그야말로 의미 가득한 현장학습이다. 아이들은 본인들의 손에서 새로운 것이 창조되는 기쁨을 누리는 중이니 얼마나 신이 났을까. 그날은 아이들이 페인트를 사 와서 적목을 색칠해 주기로 했다. 그런데 페인트는 원색이라 ‘핑크’를 칠하고 싶은 아이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고, 물감 놀이 경험을 떠올린 다른 아이가 ‘빨강과 흰색을 섞으면 핑크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신이 난 아이들은 색 혼합을 시작했다. 그 순간 유레카! 한 아이가 정말 정말 들뜬 목소리로 원감님이 계시는 교무실까지 뛰어들어온 것이다.


“원감선생님!!! 원감선생님!!! 세상에 핑크는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에요!!!”



빨강에 흰색을 더더 섞을수록 점점 연해지는 핑크를 발견한 이 순간. 이 핑크도 저 핑크도 모두 핑크.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아이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며 상기된 얼굴로 말씀하시는 교수님의 얼굴 또한 잊히지 않는다. 내가 이 에피소드를 교육적으로 바라보고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런 부분 때문이다. 우선 교사는 아이들의 관심을 반영하여 작은 프로젝트를 펼쳤다. 그리고 의미 가득한 현장학습을 갔다. 보통 현장학습을 갈 때 질문 목록을 만들기도 하는데, 아이들의 관심과 흥미에서 시작된 것은 유아지만 질문의 내용부터 다르다. 정말 궁금해서 알고 싶은 내용이니까. 재방문도 하고 사장님과 전화연결도 하고 이 프로젝트 후에는 사장님께 감사의 편지를 작성할지도 모른다. “얘들아 빨강과 흰색을 섞으면 분홍색이 나와. 파랑과 노랑을 섞으면 무슨 색이 될까? 그래 초록색!”이렇게 이미 지식이 많은 교사가 일방적으로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끼리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놀이를 하면서 발견을 한다. 이렇게 경험한 내용은 지식으로 오래 남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들어 낸 블록으로 놀이를 하는 기쁨,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이런 순간들을 모으고 싶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나는 교육적으로 크게 의미 있는 시간도 중요했지만 이런 순간에 더 감화되었던 것 같다.


“선생님! 우리가 오늘 정리를 잘해서 해님도 우리를 따뜻하게 비춰주나 보다요! 하하.”

그랬다. 나는 아이들들과 정리정돈 시간을 갖고 있었다. 대게 아이들은 정리정돈을 힘들어한다. 신나게 놀이한 후에는 더욱이 치울게 많으니까 힘들어하기 마련이다. 나는 놀이할 놀잇감의 개수를 정해 놀이를 제한하기보다는 놀잇감이 안전하게 사용한다면 최대한 허용하되, 정리를 재미있는 습관으로 만들 방법을 찾는 편이다. 그래서 이 말, 저 말 붙여가며 정리를 독려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아이의 말처럼 정리를 하는데 등 뒤가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구름에 해가 가려졌다가 다시 나오는 순간이었다. 볕이 잘 들던 교실이라 드라마틱한 효과였다. 그날 이후 나는 구름에 해가 가려졌다 나오는 순간을 맞이할 때면 어김없이 이 순간이 떠오르고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선생님! 사랑을 하면은요! 가슴이(가슴에 손을 포개어 나비모양을 만들어 대고) 콩닥콩닥 뛴대요~”

봄이 되면 떠오르는 찰나의 순간. ‘사랑에 빠진 개구리’ 동화를 보고 난 후 하원하는 차에서 들었던 말이다. 아가페적인 사랑도 있겠지만 아이의 입을 통해 들은 ‘가슴이 콩닥콩닥 뛴대요~’는 형언하기 어려운 귀여움이었다. 진심으로 사랑에 빠진 얼굴로 천진난만하게 말하던 현서(가명).



“아~ 겨울나무가 이제 추워서 반짝반짝한 선물을 달아준 거예요.”

겨울이면 생각나는 순간. 이번에도 유치원 버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겨울이 되어 벌거벗은 나무를 보며 지나가는 데 몇몇 나무가 크리스마스 전구를 감고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가을 낙엽으로 쓸쓸해진 나무를 위로해 주는 따뜻한 말. 민석(가명)이는 말도 따뜻하게 하지만 행동에도 따뜻함이 묻어 나왔다. 미술놀이가 끝나고 책상을 얼추 정리하다가 다른 아이를 도와주고 있노라면 민석이는 어디선가 물티슈를 가져와서 미술 책상 전체를 닦아주고 있었다. 놀라서 “민석아 뭐 해?”라고 물으면, “선생님 힘들잖아요~”라며 눈도 안 마주치고 시크하게 쓱쓱 닦고 놀이하러 간다.



“선생님 그러면 이번엔 일어나서 귀엽고 깜찍하게 불러볼까요?”

새 노래를 배우고 여러 방법으로 전체 부르기를 하면서 노래를 익히는 데 하진(가명)이가 추천한 방법이다. 자신들이 얼마나 귀엽고 깜찍한지 아주 잘 아는 말투. 감동적인 에피소드는 아니지만 뜻밖의 말에 한바탕 웃게 한다.


아이들은 일상에서 놀라운 발견을 한다. 또는 너무 익숙해서 쉽게 지나쳐 버린 것들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을 아주 잘한다. 그래서 나 또한 무심하게 지나쳤던 것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아이들은 작은 시인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아이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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