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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셜트래블러 Apr 13. 2021

#거대한 벽 앞에 선 선한 개인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 / 션 베이커)

‡아이들에게 있어 가난이란.


 집이 어려워져 잠시 이모 집에 홀로 지내던 때가 초등학교 4학년으로 기억한다.

아침 7시가 되기도 전에 일어나 만원 버스를 타고 경기도에서 서울로 초등학교를 다녔다. 어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어린 아이라 고된 일상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너무나 어린 나이에 버스 끝에 매달려 간신히 탑승해야만 하는 현실이 그리 슬픔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시절의 나는 작은 키 때문에 어쩌다 버스 기사님에 눈에 띄지 않아, 버스비를 내지 않아도 들키지 않는 운 좋은 날들을 기뻐하는 아이였다. 그 어린아이가 가난이 무엇인지 알았을까? 사실 잘 몰랐던 것 같다. 지불하지 않은 버스비로 간식을 사서 먹거나, 오락실을 몰래 가는 것이 즐거웠던 시기였으니까 말이다. 마치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이 아이들처럼. 가난함이 전혀 창피하지 않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에 내 어린 시절을 살포시 덧입혀본다. 

이제 영화의 멋진 풍광도, 아이들의 천진난만함도, 여유 있는 영화의 잔잔함이 무섭도록 슬프게 다가오는 것은 가난의 무서움을 몰랐던 천진난만한 그 아이가 자라, 자식을 낳고 키우는 아빠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덧 살만해진 어른이 된 나는 좁은 골목 옆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과 그 천진난만함에 살짝 마음이 붉어진다.       


‡가난은 사람의 존엄 따위를 쉽게 비웃는다


 '인간은 존엄하다.' 철학자 칸트의 말이다. 

칸트는 인간은 모든 상황에서 이성적 판단에 따라 자율적으로 자기 목적을 설정하며, 타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나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말했다. 이 자율성이야 말로 인간이 존엄성을 가지고 있는 근거다. 또한 인권을 정의할 때 ‘마땅한 권리’라고 표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은 하나의 가치이자 약속이기도 하다. 인간이 존엄성을 보장받는다는 것은 생명을 보장받는 것이며, 이는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 아플 때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하며, 굶주림에 허덕이지 않아야 한다. 이처럼 인권의 언어인 존엄은 자유와 평등을 내재하면서 ‘사람답게’사는 길에 대한 가치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멋있고 사람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문장들은 아쉽게도 책에나 적혀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땅 위를 걷고 있는 우리에게는 현실은 곧 전쟁이다. 구구절절 예를 들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눈을 뜨고 주위를 쓱 둘러보면 쉽게 느낄 수 있다. 누구나 알다시피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은, 사람의 존엄 따위를 쉽게 비웃어 버린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펼쳐질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회적 안전망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존엄이란 얼마나 가치 없는 단어인가. 어느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가난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는 게으름쟁이일 뿐이며, 경쟁에서 뒤처진 실패자일 뿐이라고 폄하한다. 하지만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아이들의 시선과 삶을 통해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그저 가난한 한 개인 혹은 가족은 불합리한 사회의 희생양으로의 삶을 살아갈 뿐이라고 말한다.


영화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가 배경인 영화다. 사회적 약자인 한부모 가정의 아이를 주인공으로 가족의 삶을 반추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여러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데, 미국의 부동산 투기와 월 스트리트로 대표되는 금융 위기 이후 서민들의 삶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쓰였다. 

1960년대 중반에 디즈니사가 미국 플로리다 주 올랜도 일대의 부동산 매입 계획을 세운다. 이 부동산 매입 계획 이름이 바로 플로리다 프로젝트다. 부동산 매입 계획은 디즈니 월드 관광객들을 주 대상으로 계획하여 화려한 모양의 모텔을 디즈니 월드 주변에 우후죽순 지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올랜도 일대의 부동산 및 경제는 추락했고,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홈리스가 되고 만다. 이렇게 지역경제가 무너지자 우후죽순 지어진 모텔에는 디즈니의 관광객보다 저소득층 홈리스들이 매주 방세를 내며 장기 투숙을 하기 시작했다. 영화는 꿈과 환상 그리고 모험이 가득한 디즈니 월드의 화려함이 맞은편 모텔들에게 그늘이 되어 두 장소를 적나라하게 대비시킨다. 맞은편 모텔에 살면서도 한 번도 디즈니 월드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 그들에게 디즈니 월드는 어떤 곳일까? 디즈니 월드에 입장하는 부유한 사람들의 모습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며 마음의 무너짐이 일상이 되진 않을까?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홈리스로 전락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눈으로 조망한 영화다. 영화의 분위기는 내내 밝은 톤을 유지하지만, 그 이면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볼 때 관객들은 숨겨진 그들의 아픔을 마주할 수 있다. 


‡선한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영화 속 주인공 무니(위 사진에서 가운데 위치)는 아직 가난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다. 친구들과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것이 행복인 순수함을 지닌 아이이기도 하다. 무니는 엄마 핼리와 한부모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으며, 매직 캐슬에 장기임대를 살고 있는 상황이다. 무니의 엄마 핼리는, 평소 약을 하고 아이 앞에서 담배를 피우기까지 하며,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다. 그녀조차 사회에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렇기에 엄마의 역할이 무엇인지, 엄마로서 아이들 앞에서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구분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런 그녀는 변변찮은 일자리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잃게 되어 결국은 생계가 어려워져 막다른 곳까지 몰린다. 결국 핼리는 아이를 위해 몸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며 생계를 연명한다. 이처럼 가난은 삶에 벼랑 끝까지 내몰고, 결국에는 사람의 삶을 비참하게 만든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바로 케이티의 이야기이다. 실업 급여를 받지 못한 그녀는 두 아이를 지키고자 먹을 것을 아이들에게 양보하는, 녹록지 않은 현실에서 애쓰는 엄마이자 여성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무료로 식품을 나눠주는 푸드 뱅크에서 지독한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눈앞의 통조림 캔을 다급히 따내어 손으로 허겁지겁 먹는다. 사람들의 시선에 놀라 울면서 ‘너무 배가 고팠어요’라며 통조림 하나에 무너진 그녀. 그녀들에게 있어 지독한 굶주림은 자신만의 굶주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몸부림이었으리라.      


*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가난함에 몸을 파는 케이티에게 다니엘이 성매매를 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한다. 이에 성매매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 영화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벼랑 끝에 몰려 성매매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비롯하여 영화에 종종 쓰이는 만큼, 자발적 성매매와 자발적이지 않은 상황에서의 성매매를 관람객들이 행간을 읽듯 구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무니의 엄마, 핼리 또한 케이티와 마찬가지 심정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일을 해도, 숨 한번 쉽게 고르지 못하는 지금의 삶이, 현재는 우리에게 절망이라고 이야기한다. 무니의 가족의 삶은 절망과 아픔으로 가득 차 있지만, 건너편 디즈니 월드가 상징하는 꿈과 희망 그리고 즐거워하는 타인의 삶이 아마 칼날과 같은 비수가 되어 그들에게 아니 우리의 마음에 날아와 꽂힐 것이다. 이 가난과 상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아무리 달리고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쓰디쓴 고리임을 깨닫는 순간 삶에서 어떠한 희망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매직 캐슬에서 장기방을 사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웃음을 어떻게 지켜줄 수 있을까. 이 영화를 지켜보는 객관적 타자인 우리들은 실제로 이러한 삶을 마주친다면 어떻게 행동할 수 있을까? 아마 바비처럼 비슷하게 행동할 것이다. 

 바비는 이들의 주변에서 모텔을 관리하며 때로는 아이들을 돌보며 선의로 대하는 착한 사람이다. 아동 성애자로 보이는 행인이 아이들과 함께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 바비는 그를 내쫓으며 아이들을 구해내기도 한다. 그는 매우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좋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선의는 그저 선의일 뿐 그들에게 결국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바비는 핼리와 무늬가 아동보호국에 의해 서로가 생이별을 하는 강제적인 상황을 그저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 핼리는 아동이 집에 있음에도 성매매를 했다는 이유로, 부모로서의 자격을 잃고 만다. 바비는 핼리와 무니의 상황을 잘 알고 있음에도 바비라는 한 개인이 그 모녀의 삶을 구원할 수 없는 것처럼, 이 영화 바비라는 한 인물을 그저 착한 사람일 뿐 무력한 하나의 개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바비가 무력한 개인이라고 해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칸트에 의하면 존엄성을 가진 인간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요소를 자기 법칙, 즉 도덕 법칙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도덕성의 법칙을 통해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하였다. 그렇기에 바비는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서 자신의 도덕 법칙을 기준으로 타인에게 존중을 실천한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는 도덕성을 가진 한 개인이 존엄성을 가진 다른 개인을 구원할 수 없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그럴까?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바비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한국도 이와 비슷한 시기가 있었다. IMF 이후 많은 사람들이 실업자가 되어 본격적으로 거리로 나왔던 때를 시작으로 여전히 고시원과 모텔 장기방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사회복지사로 근무하며 종종 장기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난 경험이 있다. 그들의 삶의 굴곡을 찬찬히 듣고 있노라면, 모진 삶을 치열하게 살아왔음에 저절로 마음이 겸손해진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 사회복지사라는 전문가로서 무엇하나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저 묵묵히 당사자의 삶의 이야기들을 함께 슬퍼하고, 때로는 함께 웃는 것이 최선이다. 마치 바비가 무니의 가정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스틸컷 (출처:네이버 영화 포토) / 영화 속 선한 인물인 바비. 영화 내 유일한 유명한 배우인 윌리엄 대포.


‡사회적 시스템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개인이 아닌 아동보호국으로 대표되는 공권력에 대해 영화가 가진 태도는 어떠할까. 영화는 개인과 대척점에 서 있는 정부를 매우 차가운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핼리와 무니 또 무니의 친구들이 매우 궁핍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그들을 위한 어떠한 대책도, 행동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안전하지 못한 환경에 방치되는 그런 순간에도 그들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불타버린 집으로 인해 핼리가 집에서 매춘을 하자, 아이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을 우려하여 엄마와 아이를 분리하는 것으로 그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한다. 정부를 대표하는 아동보호국은 누군가 신고를 해야 했고, ‘신고’라는 이유가 있어야지만 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렇게 누군가 신청 또는 신고 등 어떠한 이벤트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아이들의 삶을 전혀 관리하지 않는다. 


 미국에는 아동에 대한 보호지침이 있다. 이 보호지침은 아이의 안전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예를 들면 8세 미만의 어린아이를 일정 시간 동안 집에 혼자 둘 경우 아동방임으로 조사 및 처벌의 대상이 된다. 한부모 가정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어딘가에서 근무를 할 때, 아이를 누군가에게 임금을 주고 맡겨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핼리에게는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정부의 역할은 아이들을 관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그 기회를 이용할 수 있는 대책을 수립해야만 하지만, '자본주의'가 '정의의 세상'에서는 쉽게 제공될 수 있는 서비스가 아니다. 그렇기에 영화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하나의 사회를 매직캐슬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매직캐슬은 겉으론 화려하고 예쁘지만, 정작 객실은 열악한 매직캐슬을 통해 세계 제1의 강대국이지만 다양한 사회 문제들과 중산층의 몰락한 사회 이면을 반추한다. 이러한 측면과 맞물려 영화는 자본주의의 극단이 가져온 폐해들을 이야기한다. 특히 폐허가 되어버린 병원은 미국 사회의 의료 현실을 은유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미국의 상당수의 국민들이 의료 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하다. 2007년 마이클 무어의 영화 <식코>를 보면 미국 의료 체계에 대해 적나라하게 잘 나와 있다. 돈이 없는 한 노동자는 잘린 손가락 두 개 중 하나의 접합을 포기하는 장면이나, 비싼 약을 구입하지 못한 여성이 쿠바로 가서 푼돈에 약을 구하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유명하다.


  그렇다. 결국은 시스템이다. 소수를 위해서 만들어진 시스템은 결국 다수의 사람들의 삶을 파괴한다.  예를 들어보자. 미국에서 흑인들이 투표권을 스스로 쟁취한 지 수십 년이 지났다. 그러나 투표할 권리를 얻는 것과 실제로 투표를 할 수 있는 것은 매우 큰 차이가 있다. 무려 2014년 앨라배마 주에서의 일이다. 앨라배마 주의 모든 유권자들은 반드시 신분증을 제시해야 선거에 참여할 수 있다고 정하면서, 흑인 거주자가 많은 카운티에 위치한 교통국 사무소를 80%나 폐쇄해서 흑인들이 투표에 필요한 신분증을 발급받기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삶에 힘이 부친 흑인들은 투표에 참여하지 못한다. 비슷한 예가 더러 있다. 흑인들이 가난한 동네로 들어가게 되는 건 비단 소득의 불평등 때문만이 아니다. 수십 년간 미국의 레드 라이닝 정책*에 의해 흑인 가정들을 특정 동네로 밀어낸 후 그 동네의 부동산 가치를 떨어뜨렸다. 이것은 단지 부동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교육을 담당하는 학교의 재정은 지방세를 통해 배분되는데, 흑인들이 살고 있는 동네에는 지방세가 적어 학교의 재정이 열악하다. 결국 흑백 분리정책을 실시하지 않음에도 그 지역 학교는 가난한 흑인들과 유색인종만 다닐 것이며, 재정은 열악해 양질의 교육을 지원하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냥 개인의 노력 탓일까? 결론은 아니다. 사회적 안정망이 배제된 시스템으로 소수를 위해 혹은 특정인들을 위해 다수가 희생되는 구조를 우리도 모르게 받아들이고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면 월가를 비롯한 소수의 돈놀음에 다수의 중산층이 무너졌다.** 핼리네 가족이 임대료를 낼 수 없는 상황도, 임대료를 내지 못해 성매매를 한 핼리도, 보호받지 못해 친구들과 놀다 폐가에 불을 낸 무니도 결국 시스템에 의한 희생된 것이다. 즉 핼리가 무니를 방치한 것이 아니라 정부가 또는 자본주의적 환경이 무니를 방치한 것이기에 아이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미국 정부의 태도는 이중적으로 보인다. 아니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시스템은 완벽하지 않으며 언제나 허점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사회 시스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사람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을 어떤 기준에 의해 만들어야 할지, 서로가 생각하는 최소한이라는 기준이 어디까지 인지 활발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다만, 사회적 시스템(안전망)에 대한 고민은 본인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이들에게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다행히 이런 고민들을 직업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사회복지사이다. 우리 사회복지사들은 스스로 사회사업가라고 칭하며 근무지가 있는 지역을 기반으로 다양한 복지 사업들을 실천을 하는 귀중한 존재다. 다만 아쉬운 것은 사람의 존엄성을 위한 일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는 사회복지사들도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고민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적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정치가들 혹은 사회단체의 일로 치부해버리고 만다. 2012년 구청에서 사회복지사로 근무할 때였다. 구청 앞에서 시위가 있었는데, 시장 근처에 대형마트가 들어선다는 이슈로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각각 모여 시위를 진행했다. 이는 지역의 뜨거운 이슈였으며, 시위는 한 달 가까이 이어졌다. 이러한 지역적 이슈에 대해 사회복지사들은 어떤 일을 했을까?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사회복지사들에게는 지역적 현안을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업적 유연성이 시스템적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아 대응할 수 없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사회복지 현장에서 사회의 시스템을 고민하고 이슈거리를 사람들에게 던져야 하는 당사자들이 시스템에 갖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속상할 뿐이다.                                                  


*특정 경계지역으로 지정해서 담보 융자 등의 금융서비스를 거부할 수 있는 정책을 의미함.

**사기, 횡령 등 경제적 사범들이 살인 등에 비해 형량이 매우 적은데, 한 가정의 경제를 무너뜨리는 것은 살인이나 진배없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마도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이 있다 보니 세상을 보는 시각이 많이 달리지는 것을 느낀다. 열심히 노력해도 아이들에게 먹고 싶은 음식, 옷 한 벌 해줄 수 없는 상황은 생각 조차 하고 싶지 않다. 세상의 모든 아빠들 엄마들이 아마도 그러하리라.


‡세상에 많은 무니들이 쓰러져도 계속 자라기를..


'내가 왜 이 나무를 제일 좋아하는지 알아?'

'왜?'

'쓰러져도 계속 자라잖아'


 영화는 매직캐슬과 같은 가난한 사람이 몰린 모텔 또는 폐허가 되어 버린 의료시설과 같이 은유적으로 영화에 표현할 뿐, 모순적이고 절망적인 사회 시스템과 가난한 자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부의 차가움을 강하게 직접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또한 곁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저 착한 방관자인 우리 또한 비판하지 않는다. 친한 친구였지만, 아이들로 인한 감정이 싸움으로 번져 아동보호국에 신고한 당사자까지도 악역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즉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어떠한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는다. 쉬운 해답, 쉬운 분노에 호소하지 않는 영화이다. 좋은 영화는 세상을 구하는 법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이야기처럼, 사회적 환경에 의해 인간답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엄마와 아이가 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일련의 과정들을 잔잔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렇기에 아름다운 풍광과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이 아이를 키우는 내게 더욱 서글프게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 속 자주 등장하는 비가 온 뒤에야 비로소 나타나는 무지개와 쓰러져도 계속 자라는 나무를 좋아한다는 무니의 저 대사를 통해, 영화는 영화를 관람하는 우리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남겨둔다. 마치 무니 또한 쓰러져도 계속 자라나길 바라면서.


‡영화가 끝난 후


 10년, 20년이 지난 후 미국 역사를 보면 금융권이 미국에 끼친 영향에 대해 기록될 것이다. 정점에 다다른 자본주의가 큰 허풍에 지나지 않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렸는지. 

 마틴 스콜세지가 만들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마고 로비가 열연한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를 함께 보면 좋을 같다. 영화를 통해 거짓으로 쌓은 돈놀음 실체를 알 수 있다. 좀 더 진지한 영화로는 아담 맥케이가 만든 <빅쇼트>를 추천한다. 크리스찬 베일, 스티브 카렐, 라이언 고슬링, 브래드 피트 등이 등장한다.  이 두 영화가 금융쇼크의 과정 등을 조망했다면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그 이후 서민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이 작품이 금융쇼크가 일어난 후의 변화를 묘사하고 있다면, 시간이 흐른 지금 서민들의 삶을 묘사한 영화 <노매드 랜드>까지 그들의 삶이 실질적으로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볼 수 있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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