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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셜트래블러 May 24. 2021

#다수를위해 밀려난 자들의 슬픔

윈드 리버(2017/테일러 쉐리던)

‡9-4


 2016년 5월 28일. 그에게는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일상이었을 것이다. 

한 달 월급 당시 144만 원. 그날 점심 혹은 저녁은 가방 안 컵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려고 했으리라. 어느 외동아들이었던 한 청년은, 젊음의 즐거움을 잠시 뒤로한 채 어린 나이에 사회 현장에 뛰어들었다. 살림이 어려웠던 집에 보탬이 되고자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는 젊은이였지만, 해가 눈을 뜨는 새벽 9-4라고 쓰인 지하철 플랫폼에서 작업을 하던 그는, 다시 나오지 못했다. 

2016년의 아픔이 채 가시지도 못한 2년 후의 어느 새벽, 외주화를 반대하던 한 젊은이는 홀로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선 후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2021년 인천, 24시간 가동되는 공장. 안전관리자 없이 근로하던 50대 노동자도 컨베이어 벨트에 오른 후 돌아오지 못했다. 그 1달 전에도, 1년 전에도.. 


 공리주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공리성을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하는 사상이다. 현재를 살아가며 공리주의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이 아직 있을까? 누구나 공리주의 사상의 문제점을 머리로는 다 알고 또 이해하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 세상은 공리주의로 돌아간다. 다수를 위해 소수가 이미 착취당하는 세상에 우리는 이미 살아가고 있다.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모두들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의 '소수'가 되고자 발버둥치고, 욕망하며 살아간다. 아마도 이러한 세상에서 살게된 원인은 아마 자본주의의 도래가 아닐까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투입 대비 최대 효과를 누리고 싶은 욕망의 정점을 뜻한다. 그렇기에 ‘사람’과 같은 가치는 이미 ‘자본’이라는 단어의 가치보다 못한 가치가 된 지 오래다. 아니 같은 사람이라도 그 의미와 가치가 서로 달라졌다. 회사들은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해 사람의 단가가 적은 곳으로 공장을 당연히 이주한다. 즉, 각 나라마다 혹은 도시마다 사람 몸 값이 다르게 책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주한 공장에서는 특별히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 안전에 대한 것은 전혀 투자하지 않는다. 설사 사람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더라도. 그들은 어떻게든 값싼 몸값의 인원을 최소로 투입해 큰 이익을 얻을지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흐름과 맞물려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못하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해야 사람의 가치를 본연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테일러 쉐리던이다. 그의 감독 첫 데뷔작 <윈드 리버>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이 시대의 욕망이 얼마나 많은 비극을 일으키는지 정면으로 직시하는 영화다. 비극과 비극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 땅에 아픔을 감내하며, 수긍하며 살아가는 이들. 자본을 욕망하는 이 시대에, <윈드 리버> 는 자본주의라는 코인에 탑승하지 못하고 밀려난 노동자들과 무자비한 약탈로 척박한 곳까지 밀려난 선주민들 간의 스산한 아픔을 그린 영화다.


‡국경에 천착한 각본가     


 2020년 현시대의 최고의 각본가 중 한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일까? 아마 그 후보 중 한 명은 테일러 쉐리던(Taylor Sheridan) 일 것이다. 그는 각본가로 이름을 알리기 전 배우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배우로서 성공하지 못했다. 약 6년 후 그는 각본가로 다시 영화계에 발을 내디뎠다. 그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첫 작품은 아마도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다. 시카리오는 당시 드니 빌뇌브라는 영화계에서 최고 중 하나로 인정받는 감독이 맡았기에 사실 테일러 쉐리던의 각본이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이후 테일러 쉐리던은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의 각본을 집필하고, 비평과 흥행에 한 번 더 성공한다. 그제야 각본가로서의 테일러 쉐리던을 영화계에서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후 테일러 쉐리던은 자신이 쓴 각본으로 영화감독을 맡아 연출하는데, 그의 영화감독 데뷔작이 바로 <윈드 리버>다. 테일러 쉐리던은 이 영화로 감독으로서 비평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큰 성공을 거둔다. 이렇게 시카리오부터 윈드리버까지 연달아 영화를 성공을 시키는데, 위 영화들에는 놀랍게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시카리오>는 멕시코 후아레즈, <로스트인 더스트>는 미국 텍사스, <윈드 리버>는 와이오밍이 영화 속 배경이다. 이 세 곳은 모두 국경 혹은 경계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위 세 영화를 묶어 국경 3부작*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그는 국경이라는 곳에 천착하였을까.      


*영화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의 속편인 <시카리오:데이 오브 솔다도>가 국경지대로 포함이 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위 세편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져 국경 시리즈에 포함을 시키지 않기도 한다.


영화 스틸 컷 (출처 : 네이버 영화 포토)


‡버려진 땅 : 밀려난 자들을 위한 보호구역 


 발자국마저 사라지는 고요한 설원. 시시각각 내리는 눈 때문에 사람이 지나온 발자국마저 금세 사라지는 곳. 온 세상이 하얀색으로 덮여 스산함이 우리의 눈 위에 물드는 곳. 도저히 사람이 살지 못할 것 같은 설원인 ‘윈드 리버’에 뿌리를 내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 정부의 원주민 이주 정책에 의해 이 땅에 살고 있었던 선주민들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실제로 윈드 리버라는 인디언 보호구역의 지역 이름을 그대로 영화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의미를 우리에게 건네준다. 미국은 선주민들을 보호라는 명목으로 땅을 지정하고 그들을 몰아냈지만, 보호가 무색할 만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아니, 버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영화에서도 이러한 부분을 세세히 표현하고 있다. 한 인디언 소녀의 죽음을 통해 영화는 인디언 보호구역의 현실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마을에서 가장 똑똑하고 모두에게 기대를 받는 소녀가 죽었음에도, 그들은 자력으로 죽음을 수사할 인원과 능력이 전무하다. 약 9,000㎢가 넘는 땅에 배치된 인디언 경찰은 고작 6명. 그마저도 잦은 눈보라로 인해 수사마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들은 연방정부에 도움을 요청하고, 이내 제인이라는 여성 FBI 한 명이 도착한다. 영화는 제인을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가 인디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 태도에 대해 보여준다. FBI라는 명목으로 도착한 제인은, 현장에서 수사를 지휘하는 경험치가 현저히 떨어져 보이는 사람이다. 혹한의 날씨를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얇은 옷을 입고 오는 등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보다 못한 인디언들이 옷을 빌려준다. 영화는 한 발 더 나아가 착의하는 씬에서 제인의 속옷이 노출되는데 그 속옷을 통해 그녀의 FBI의 경험과 실력보다, 여성다움이 의도적으로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테일러 쉐리던의 전작인 <시카리오>에서도 여성 FBI가 주인공(에밀리 블런트)으로 등장하는데, 현장 경험이 풍부하고 매우 실력이 뛰어난 여성으로 묘사된다. 즉 전작을 통해 FBI의 능력을 드러내는 등 충분히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윈드 리버>에서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즉 감독이 의도하는 바는 결국, 미국 정부가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음을 알려주는 장면과도 같다. 마지못해 아무나 한 명 파견했다는 이야기다. 미국이 인디언들을 대하고 있는 태도는 이처럼 명확하다.


 미국은 사실 인도라고 착각한 땅을 멋대로 침략하고, 대륙에 살던 선주민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탄압했다. 결국 여러 번의 전쟁 끝에 그들을 보호구역으로 이주시켰지만 일방적이고 인디언들에게 불리한 조약이었다. 이러한 <인디언 이주법>은 사실상 무력이 기반된 강제 이주였으며, 이를 따르지 않을 시 부족을 멸족시킨다는 선언을 기반으로 한 협박이나 다름없던 정책이었다. 이에 반발한 인디언들은 저항하고 항전하기도 하였지만 많은 피해를 입고, 결국은 밀려났다. 

어떻게 보면 정말 역사는 아이러니하다. 아니 역사의 진실은 잔혹하다. 1429년 콜럼버스 일행이 땅에 첫 발을 딛었을 때, 인디언들은 그들을 환대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콜럼버스 일행은 인디언들을 납치하고 노예로 팔기도 하였으며, 그들에게 손목을 자르는 등 약탈, 강간, 고문, 살인의 잔인한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이러한 그들이 전 세계의 위인전 목록에 한자리를 차지하는, 미국의 땅을 발견한 개척자로서 추대받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바로 아이러니다. 

결국 그들은 선주민들의 땅을 빼앗고,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에 몰아넣은 후 그들의 자생력을 다양한 방법으로 말살시켰다. 영화는 카지노에 대해 언급이 등장하는데, 카지노에 인디언들이 취업하기도 하고, 카지노의 수입의 일정 부분을 인디언들에게 사용하기도 한다. 카지노는 그들이 자생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한다. 카지노의 혜택을 받는 자와 받지 못하는 자들의 반목을 유도하고, 도박에 대해 경각심을 쉽사리 잃게 만들어 카지노는 달콤한 유혹으로 청년들의 미래를 거세하기도 한다. 미국은 그들에게 필요한 교육, 일자리 등을 카지노 하나로 소위 '퉁'을 치며 마치 할 일을 다 한 것 마냥 모른 척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미국은 그들이 필요한 교육, 일자리, 치안 등은 도외시한 것을 넘어 말살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인 흩날리는 성조기 옆에 버려진 것 같은 인디언 깃발처럼 말이다.


영화 스틸 컷 (출처 : 네이버 영화 포토)


‡버려진 땅으로 밀려난 자들 


 인디언 소녀 나탈리의 죽음을 수사하던 그들은 3년 전에 벌어진 살인 사건과 유사점을 발견한다. 사건에 진실에 다가가던 그들은 백인 남성의 시신을 발견한다. 발견된 시신 근처 눈 위의 스노모빌 자국을 따라간 일행은, 한 회사의 경비업체 직원들의 숙소까지 흔적이 이어짐을 알게 된다. 경찰들과 제인은 숙소를 수색하고자 하지만, 경비들과 총격전이 일어나고 코리의 도움으로 그들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영화의 해당 씬은 트레일러 하나와 벌판에서 총격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관객들이 긴장감이 유발되도록 촘촘히 구성되어 있다. 트레일러를 조사하겠다는 제인과 대화하며 제인 일행을 둥글게 둘러쌓는 경비원들로 시작해, 관객들이 예상하지 못한 총격전 타이밍까지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키는 감독으로서의 노련함이 엿보인다. 이 뿐만 아니라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트레일러를 통해 범죄자들의 심리 또한 놓치지 않는다. 산속 어딘가 하얀 설원 위에 덩그러니 위치한 트레일러. 영화 오프닝 시퀀스에서 소녀가 뛰는 장면이 나오는데 소녀가 쓰러져 죽은 곳은 트레일러에서부터 무려 10㎞ 떨어진 곳이다. 즉 트레일러 주변에는 공장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벌판이다. 이를 감독이 보여줌으로써 범죄자의 마지막 대사를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오롯이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이런 곳에 갇혀 사는 기분이 어떤지 알아? 여긴 아무것도 없잖아! 여자도! 즐길거리도! 그저 눈만 쌓이고, 또 쌓이고! 지루하다고! 지겨워!!!’     


 그러자 코리가 묻는다.     


‘우리 집안은 여기서 100년 가까이 살았어. 너희한테 뺏기지 않은 건 이 눈과 지루함뿐이지. 넌 뭘 뺏어갔지?’     


 범죄자는 백인이다. 한 사회의 주류임에도 왜 인디언 보호구역까지 와서 갇혀 산다며 이야기를 할까? 그 역시 자본주의의 탐욕에 밀리고 밀린 사람이다. 경쟁에서 실패해 그저 이런 직업밖에 얻을 수 없었던 인물이다. 이렇게 밀려난 사람들이 마치 세상의 끝에 와서 아웅다웅 살아가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그중 인디언 소녀 나탈리와 연예했던 경비원 맷은 나탈리에게 대도시 이야기를 해주며, 그녀의 꿈을 부풀리기도 한다. 마치 우리나라 1970년대 영화들에서 빈번히 등장한 시골 소녀가 연상되는데, 늘 그렇듯 그녀들은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다. 


 그리고 더욱 잔인한 이야기가 하나 더 남아있다. 선주민이었던 그들을 참혹한 땅에 밀어내고도, 무엇이 더 남아 있어 공장들이 들어서서 땅을 착취하고 있을까. 아마도 셰일 오일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테일러 쉐리던의 두 번째 작품인 <로스트 인 더스트>에서는 셰일 오일로 인해 텍사스 마을 전체가 몰락한 이후의 과정을 그리고 있어, 자본의 탐욕에 대한 결이 <윈드 리버>와 이어지기에 감히 추측해본다. 이렇게 공장이 세워져 버려진 땅의 자원마저 고갈시키는 동안, 회사는 자본이라는 피를 빨아드린다. 그리고 이렇게 밀려난 자들은 참혹한 삶을 살아내도록 강요당한다. 그렇게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본에 대한 탐욕은 사람들을 존엄이라는 가치에서 멀어지도록 밀어낸다.      


‘여긴 운이란 없는 곳이에요. 운은 도시에나 있죠. 여긴 그런 거 없어요. 지나가는 버스에 치이거나, 은행에 강도가 들거나, 건널목에 전화를 받을지 말지, 그런 일상의 문제가 아니에요. 여기선 살아남거나 당하거나 둘 중 하나예요.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곳이죠.’     


 마치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과 같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일상의 환경은 그들이 게으르거나 약해서일까. 이미 힘 있는 자들, 돈이 있는 자들이 힘없고 약한 자들에게 삶이란 원래 공평한 것이니 경쟁을 하자고 말하자는 꼴이다. 그리고 아귀다툼 속 지옥에서 살아가는 그들을 그들의 탓으로 치부해버림으로써 불편한 진실을 잊고, 눈을 돌린다. 마치 세상은 공평했던 것처럼. 

그리고 경쟁에서 밀린 자들을 게으르다며 쉽게 개인의 탓으로 치부해버린다.


‡각본가의 마지막 자막


‘지금까지 인구 통계에 잡힌 실종자 수치에는 아메리칸 원주민 여성들은 집계된 적이 없다. 그 실종자 수가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테일러 쉐리던의 의도와 목적은 명확하다. 심지어 인터뷰에서는 인디언 여성이 미국 내 타 여성 인종에 비해 강간을 당하는 비율이 4배라며 강조하며, 미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현실감 있게 전달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테일러 쉐리던은 자본이 침식한 대지에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현실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영화를 통해 사회에 묵직한 메시지를 던졌다. 즉 지금 이 순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반추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연대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가치 있는 메시지라도 영화의 완성도가 뒷받침되지 않는 다면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는 점에서,  영화를 통해 대중들에게 큰 울림을 선사한 이 시대 최고의 각본가이자 신예 감독인 테일러 쉐리던에게 존경과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세상에 밀려난 자들을 위한 재미있는 영화들이 많이 개봉되었으면 좋겠다. 수많은 영화들이 우리의 마음을 울려 우리가 타인을 향해 손을 내밀 수 있도록 종용함으로써, 좀 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만한 세상이 한 걸음이라도 빨리 도래하면 좋겠다. 그저 영화를 좋아하는 어느 사회복지사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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