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영화 특집 - 와일드(2014) /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
☆ 여행 영화 특집 :
- 와일드(2014 / 장 마크 발레) +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2013 / 벤 스틸러)
여행은 생각보다 외로웠다.
20대 중반까지 생각하고 있던 여행은 푸르른 초록색 바다 앞 모래사장에 누워 물결에 부딪히는 빛과 눈을 마주치는 여행을 상상했다. 칵테일은 덤이고, 저녁에는 황금빛 일몰을 이불 삼아 안마를 받고, 식사로는 집게가 싱싱한 랍스터를 비롯한 해물 뷔페가 손 앞에 펼쳐진 그런 여행이었다. 늘 그렇듯 현실은 냉혹하다. 20대 후반이 돼서야 첫발을 내디딘 약 1년간의 배낭여행은 심심함과 외로움으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수년이 흐른 지금 그때의 여행의 발자국들을 돌아볼 때 수많은 영화와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진정한 나만의 자아를 발견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여행은 아마도 나의 생각과 마음에 무언지 모를 약간의 흔적을 새겼으리라. 그것은 낯선 공간과 문화가 주는 매혹을 통해 세상을 관찰하고 다양한 사람들의 사람살이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넓어졌으리라 감히 추측해본다.
영화 <와일드>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파괴한 한 여성(셰릴)이 수 천 킬로미터의 극한의 공간인 PCT를 걸으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이다. PCT는 남미에서 북미를 가로질러 미국 서부를 종단하는 약 4300km의 도보 여행 코스이며, 바위로 이루어진 등산로와 눈 덮인 산맥, 사막 등 극한의 자연환경으로 이루어진 길이다. 주인공인 셰릴은 다양하고도 험난한 자연환경을 걸으며, 험한 여정이 주는 고통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하나하나 초연하게 마주하며 내적 성장을 이루어간다. 특히 영화의 엔딩에는 실제 주인공의 사진이 하나씩 관객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실화가 주는 힘과 감동을 우리는 마주할 수 있다. 이처럼 여행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과 마주하는 영화와 책은 다양하다. <꾸베씨의 행복여행>, <비포 시리즈>,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등이 있다. 특히 2010년 개봉한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한국에 여행의 열풍을 불러왔을 만큼 누구나 꿈꾸는 여행의 표본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영화의 원제목처럼 Eat, pray, love 이 세 가지를 통해 진정한 나를 찾고 인생을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이용철 평론가는 별 1.5개를 주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진짜 힘겨운 사람이 보면 욕부터 나올 영화’라고 평했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는 ‘1년 여행의 비용 대비 깨달음이 너무 소박하며 원작과 달리 돈 많은 언니의 투정처럼 비치는 것도 사실’이라는 이야기가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대변한다. 영화의 행복한 엔딩을 뒤로하고 현실과 마주한 다수의 사람들은 곧 리즈의 여행을 통한 자아 찾기는 우리에게 여행을 통해 소위 ‘플렉스’**하는 모습으로 비친다. 아마 현실이라는 곳에 발을 디딘 우리는 그보다 더한 고생과 역경의 삶을 살아내고 있기에 영화 속 리즈의 자아 찾기는 우리에게 공감이 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내면을 살피는 여정은 각자의 이유와 자신에 맞는 여정 방식이 있기에 의미가 있다.
또 다른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와 <와일드>의 자아 찾기 모험의 중간 정도 지점에 있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인터넷의 발달로 폐간이 예정된 잡지사 노동자로서 마지막 마침표를 찍기 위한 여정들을 그린 영화다. 사양산업 노동자 중에서도 마이너에 속했던, 어느 것 하나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월터는 마지막으로 출간될 잡지의 표지 사진을 본인의 실수로 잃어버린다 월터는 사진을 다시 찾기 위해 세계 곳곳을 누비는 여정을 잔잔히,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펼쳐낸 영화이다. 이러한 모험은 특별한 일 또는 타인들과 경쟁하고 도전하는 일을 할 용기가 없어, 그저 머릿속에서 상상만 했던 그가 껍질을 깨고 특별한 일탈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매개체가 되었다. 반면 와일드의 셰릴은 월터와는 다르게 일탈로 내디뎠던 그녀의 삶을 하나씩 반추하며 다시금 제자리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는 영화다.
*라이언 머피 감독,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2010년 개봉 영화, 소설 원작(엘리자베스 길버트 저).
**돈 자랑을 하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산둥성이를 오른다. 발에 상처가 나고 엄지발톱을 빼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아파하는 셰릴. 자신의 실수로 신발 하나가 산 밑으로 떨어지고, 분노하는 셰릴이 남은 신발 하나마저 던지는 것으로 그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행을 시작하는 그녀. 그녀가 PCT를 시작하기 위해 선택한 첫 숙소인 모텔에서는 천장에서 물이 똑똑 떨어진다. 배낭에 물을 가득 채우고 배낭을 매 보지만 일어나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군다. 간신히 일어나 여정을 시작하는 셰릴. 그녀는 실수투성이다. 연료를 잘못 준비해 물을 끓이지 못하고 내내 차가운 죽으로 식사를 대신한다. 이렇게 걷기 시작한 9일. 방명록에 이렇게 적는다.
‘내 모습 그대로 받아 줄래요?’
완벽한 사람은 없다. 아니 완벽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프로페셔널을 요구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어리숙함과 잦은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이는 끊임없이 자신을 탓하고 채찍질하게 만든다. 월터 또한 그저 소심하고 특별한 재능이 없는 사람이기에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구조조정 1순위가 되어버린다. 이는 어머니의 부양비를 비롯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그이기에 분실된 사진을 다시 얻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용기는 늘 상상 속에만 있던 사람이 말이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30대 뉴요커이자 저널리스트인 리즈도 결혼생활의 어려움으로 이혼하는 아픔을 겪는다. 사람들이 보기에 리즈는 보편적으로 정의되는 완벽한 삶을 살고 있는 인물이나 자신에게 찾아온 균열적인 시선들로 인해, 타인이 정의하는 내가 아닌 진짜 자신을 마주하기로 결심한다. 곧 그녀는 균형적 삶을 살아내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이처럼 누구나 셰릴이 매고 있는 무거운 배낭처럼 다양한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간다. 무거운 삶의 무게가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삶을 우린 이미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PCT에 첫 발을 내딛는 셰릴. 무거운 배낭만이 그녀를 지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길을 걷다 뱀을 만나 놀라기도 하고, 잠을 자다 침낭 안으로 들어온 송충이에 놀라 호각을 크게 부르기도 한다. 약 30kg의 배낭을 메고 하루 20km를 걸어야 하는 길. 하루에 언덕을 몇 번이라도 넘어야 하는 그 길을 셰릴은 자신과 마주하며 외롭게 홀로 걸어간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홀로 걸어갈 수 있는 기회는 사실 많지 않다. 아니 어쩌면 자기 자신을 피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기기들과 유튜브와 같은 매체는 우리의 쉼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단조로운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심지어 화장실을 가는 잠깐의 시간에도 휴대폰을 소비하는 TMI*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또한 타자와의 소통을 위한 모임은 대부분 유희 위주의 모임으로 퇴색될 때도 많다. 책모임 등 자신의 내면을 사유하며 함께 삶을 나누는 공동체적 모임도 많이 활성화되었으나, 여전히 부족하다. 혼밥과 혼술 등 혼자만의 문화 또한 이미 자리를 잡았으나 진정한 의미의 혼자됨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의 손에 스마트 폰 등이 들려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기 여간 쉽지 않은 지금, 어깨 위에 배낭처럼 지워진 현실의 무게가 우리를 짓누르기도 한다. 그럴수록 우리에게 혼자만의 시간이 더욱 필요한지도 모른다.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습관은 마침내 내가 당한 아픔들에 대한 의식과 기억을 모두 사라지게 해 주었는데, 이처럼 나는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진정한 행복의 샘은 우리 자신 속에 있으므로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은 결코 타인들에 의해 불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 갔다.’**
내면과 마주하는 일은 부끄러운 혹은 상처 받은 생채기를 살펴보는 일이기에, 두렵거나 마치 발가벗은 느낌이 들 수 있다. 그럼에도 생채기를 살펴야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일 수 있기에, 우리에게 자발적 고독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내 모습 그대로 받아 줄래요?’
셰릴이 자신에게 분노하고 부끄러워하고, 실망한 지 9일이 되어서야 고백한 말이다. 그리고 10일이 되어서야 배낭의 짐을 하나씩 정리한다. 필요 없는 욕심들을 과감히 버린다. 마치 삶을 하나씩 정리하듯이.
*Too Much Information : 너무 과한 정보
**장 자크 루소,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진정으로 가깝고, 진정 현재에 머물며, 진정으로 내 것인 인생. 흘러가게 둔 인생은 얼마나 야성적이었던가.’ (영화 와일드 대사)
가난한 삶, 폭력적인 아빠, 부모의 이혼으로 불우했던 유년시절이었지만 엄마라는 행복이 있어 견딜 수 있었던 셰릴. 하지만 엄마마저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삶을 포기해버린 그녀였다. 셰릴이 마주한 날 것 그대로의 과거는 아픔과 후회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이후 영화는 첫 장면으로 다시 돌아간다. 엄지발톱을 뺀 셰릴은 슬리퍼를 신고, 발과 슬리퍼를 테이프로 고정한 후 다시 길을 떠난다. 이전처럼 그녀는 포기하지 않는다. 눈에 발이 빠져도, 흐르는 차가운 시냇물을 온몸에 적셔가며 건너간다. 주로 남자들만 걷는 트레일에서 다른 남성들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당하기도 하고, 기자라는 한 남성에게 부랑자로 오해를 당하기도 한다. PCT를 걷는 여정 길은 신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감정적 고통과 두려움까지 불러일으키는 험난한 여로이다.
월터의 여로 또한 녹록지 않다. 삶의 정수가 담긴 필름을 받기 위해 전설의 사진작가 숀을 찾아 지구 반대편 그린란드로 떠나는 월터. 그는 그린란드를 비롯하여 아이슬란드, 아프가니스탄, 히말라야로 숀과 숨 가쁜 추격전을 펼친다. 그 와중에 헬기에서 뛰어내리고, 상어에게 쫓기고, 화산 폭발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기도 한다. 영화 와일드의 셰릴과는 결이 다른 여행이지만 여행을 통해 알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을 깨닫게 되는 변화하는 것은 같다. 와일드는 내면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여로였다면, 월터는 잊고 있었던 내면의 열정을 깨우고 삶의 목적을 발견하는 영화다. 이는 영화 내에서 색으로 구분을 명확히 표현했는데, 파란색과 빨간색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파란색은 차갑고 수동적인 이미지라면, 빨간색은 열정적이고 활동적인 이미지를 표현한다. 영화 초반의 수동적이고 상상하며 멍하니 있는 것을 좋아하던 월터는 늘 파란색 넥타이를 매고 있다. 그러던 그가 숀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날 때 빨간 비행기가 등장하며 LIFE*가 새겨있는 활주로를 지나 그린란드로 떠난다. 그린란드에 도착한 월터는 렌터카 회사에 방문하여 차를 대여한다. 이때 영화는 노골적으로 월터에게 빨간색 차량과 파란색 차량이 있으며 무엇을 고를 것인지를 묻는다. 당연하게도 빨간색 차량을 선택하는 월터. 이후 헬리콥터에 오르고 바다로 뛰어내리는 월터는 삶을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화산지대에서 숀을 찾는 여정은 그가 멍하니 상상만 하는 이전의 월터를 버렸음을 선언한다. 보드를 타고 내려가며 균형을 잡기 위해 그가 매고 있던 파란 넥타이를 손에 감아 아스팔트에 갈려 찢어져버린다. 심지어 옷도 빨간색을 입고 있다. 그렇게 그들은 진정으로 본인의 것인 인생을 깊게 마주하고 변화시킨다.
*정확히는 라이프지의 모토이다. 월터가 그린란드에 가기 위해 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기를 타는 과정 내내 라이프지의 모토인 문장이 각 씬마다 나뉘어 나온다. 즉 영화에서는 라이프지의 모토가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임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중 라이프사의 모토)
셰릴은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출발하여 1.700㎞의 거친 길을 홀로 걸어간다. 혼자라고 여겼던 자신의 삶도, 눈앞에 놓인 트레일도, 셰릴은 늘 외로웠다. 늘 무언가 의존했던 셰릴. 자신과의 싸움일 거라 생각했던 외롭고 힘든 길. 셰릴은 그 길에서 여행에 관한 도움을 받고 고독한 트레일 속에 정신적인 위로가 되어 주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게네디 매도우스 쉼터에서 만난 사람들은 배낭에 필요 없는 짐을 하나씩 정리해주고, 그녀를 응원한다. 한 동료는 눈이 많이 와 길이 막히자 버스를 타고 가라고 조언한다. 안된다며 거부하는 셰릴에게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뭘 선택하든 자책하진 말아요. 여기까지 온 것도 이미 대단하니까.’ 그렇게 삶을 돌아가는 법도 배우게 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신발을 버린 그녀는 사람들에게 신발을 주문하여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뻐하기도 한다. 또한 자신처럼 길을 걷는 여성을 만나 서로 응원하며 마음을 나누기도 하고, 동료를 만나 조언을 얻기도 한다. 셰릴이 걷기 시작한 지 90일이 되던 날. 비가 오는 길에서 만난 할머니와 아이를 만난다. 아이는 자신에게 말 못 할 문제가 있다며 셰릴에게 이야기한다. 그러자 셰릴은 누구에게나 문제가 있다며 아이에게 돌아가신 엄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 셰릴을 위해 아이는 노래를 불러준다. ‘작별을 서두르지 말아요’ 아이와의 인사 후 무너져 울어버리는 셰릴은 엄마와의 그리움을 회피했던 그녀는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며 쏟아내는 법을 배운다.
‘보고 싶어.’
이렇게 여행의 종장이 돼서야 셰릴은 내면을 직면한다.
월터는 모히칸 머리를 하고 주니어 스케이트보드 대회에 우승한 경험이 있다. 이렇게 자유롭고 특별했던 월터를 그대로 인정해 주었던 것은 바로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의 죽음. 그때부터 월터는 집안의 생계를 위해 파파존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계부를 쓰는 삶을 살아갔다. 아버지를 잃고 자기 자신도 잃었던 월터는 숀을 찾아가는 여정을 통해 본연의 열정을 회복한다. 결국 히말라야에서 만난 숀에게 사진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얻고 그렇게 여행을 마무리한다. 결국 숀이 선물로 준 지갑에 필름이 있다는 것을 알고 확인할 겨를도 없이 회사에 제출하고 그는 회사를 나온다. 이후 용기를 내 직장 동료 셰릴에게 고백하고 함께 마지막으로 출간된 잡지의 표지 사진을 확인한다.
이렇게 여행은 그들 각자 본연의 모습을 직면하게 하였으며 그들은 성장하였고, 각자의 여행의 종장에 다다랐다. 하지만 오롯이 그들 본인의 능력과 행동만으로 여행의 종장에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행을 하며 알지 못하는 익명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기 때문에 종장에 이룰 수 있었다. 셰릴의 위태로운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배낭의 짐을 덜어준 타인과 길을 잃은 셰릴을 위해 차를 태워주고 밥 한 끼를 대접했던 부부, 길의 정보를 공유하며 함께 걸어갔던 사람들, 마음에 위로를 선물해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월터 또한 마찬가지이다. 헬기를 태워준 사람, 인형을 보드로 바꿔주었던 아이들, 화산이 폭발했을 때 차를 타고 와 위험에서 구해준 사람, 여행에 대한 정보를 주었던 또 의지가 되었던 셰릴, 공항에서 억류된 월터를 도와준 하모니 토드, 자신의 회사생활을 인정해준 동료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돕고 함께 하였기에 여행을 훌륭히 마무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면의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여행길은 어떠했을까.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떠났던 나의 1년간의 세계 여행은 영화처럼 극적이지도, 감동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삶이라는 여정을 천천히 뒤돌아보면 나와 함께 했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한 명씩 떠오른다. '나'라는 인간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냈다는 것은 착각임을 깨닫는다. 미성숙한 나를 인정해주고 함께 곁을 내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어른이 된 지금도 성숙에 다다르지 못하고 늘 도우고 도움을 받는 삶을 이어간다. 나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아니 인간은 연약해 서로를 살피고 도와야 하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김한다.
언젠가 다시 여행을 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아니 앞으로의 삶의 남은 여정길에 타인에게 손을 내밀어 온기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