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켄 로치)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등록 번호도, 화면 속의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혹시 영화를 관람하지 않으셨다면 꼭 영화를 관람한 후에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아니 글을 읽으시지 않아도 좋으니 무조건 영화를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이 영화를 보기 전의 당신과, 본 후의 당신은 달라져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여행 중 호주의 한 한인교회를 방문했을 때 들었던 이야기다. 어느 한국 사람이 머리 수술을 호주 병원에서 받았다. 수술 후 비용에 대해 습관적으로 걱정했던 어머님은 병원 퇴원을 할 때야 비용이 무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무료라는 것에 감사한 환자분은 음료수를 사들고 의사를 찾아갔다. 이에 오히려 놀란 의사는 당연한 것에 왜 이렇게 하냐며 음료수를 받지 않고 환자를 돌려보냈다고 한다. 당시 교회에서는 ‘당연한 것’이 상당히 화제였던 상황이었던 것 같다. 분명 여행을 떠나기 전 호주의 문화와 역사 등을 공부했음에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매우 놀랐다. 역시 글로 배운 것과 경험은 천지차이다. 호주의 복지는 매우 좋을 수밖에 없다. 그들의 뿌리가 바로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대표되는 영국이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산업혁명을 일으킨 나라, 처음으로 사회민주주의를 확립해 전파한 나라, 비가 자주 내리는 나라, 축구 종가로 유명한 나라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나라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특히 사회복지를 전공한 사람이라면 분명 한 번은 영국 사회복지의 역사에 대한 리포트를 학교에 제출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전공자 중 한 사람으로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영국인들의 삶이 내게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켄 로치. 그의 영화는 늘 사람이 중심이다.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의 무미건조한 삶을 늘 영화로 그려내 좌파 영화감독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는 1960년대 자본가들이 중심인 영국 사회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삶을 살아냈고, 그의 가족과 이웃들의 일상을 자연스럽게 영화에 녹여내는 감독으로 성장했다. 그의 영화는 늘 삶 속에서 인간답게 살아가고자 발버둥 치는 모습을 주로 그리는데,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영화의 사상적 배경으로 삼는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사회적 시스템과 부딪치고 이를 비판하는 영화가 주를 이루기도 한다. 어쩌면 좌파 감독이라는 그의 별명은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또한 켄 로치 감독은 영화의 내용뿐만 아니라 배우들도 실제로 영화의 배경과 사상이 비슷한 사람을 캐스팅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이번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주연을 맡은 데이브 존스는 실제 목수 아버지에게서 자란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며, 케일리 헤일리는 노동자 출신으로 어려운 생활을 겪었던 배우다. 또한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2014년 영화 <지미스 홀> 이후로 은퇴를 선언했던 ‘켄 로치’ 감독이 겨우 2년 만에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와 만든 작품이다. 1936년생의 노장 감독이자,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라는 작품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던 명감독이기에 그의 선택과 작품에 많은 관심이 쏠렸다. 켄 로치 감독은 인터뷰를 살펴보면 2015년 영국에 보수당이 집권하고 복지정책을 축소한다는 발표를 했다고 한다. 그는 평소 영화를 통해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감독이자 사회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는 감독이기에, 보수당의 발표에 더욱 분노했었고 이에 대한 대답으로 만든 영화가 바로 <나, 다니엘 블레이크>다. 그렇기에 정면으로 복지제도 시스템에 대해 비판하며, 인간을 위한 복지제도라는 사회적 시스템이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얼마나 훼손하는지 영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암전 된 화면에서 들리는 대화. 형식적이고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질문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기시감이 드는 오프닝 장면은 우리를 그들의 대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관공서의 국가 의료 전문가에게 전화를 걸었던 주인공 다니엘. 그는 심장이 좋지 않아 실업수당을 받으려고 심사를 받는 중이다. 팔을 들어 올릴 수 있는지, 앉았다 일어날 수 있는지 등 매뉴얼대로 차례대로 묻는 공무원에게 다니엘은 자신의 심장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며 벌컥 화를 낸다. 결국 그는 적은 점수를 받고 실업수당 이용자 선정에 탈락하고 만다.
다니엘은 평생을 목수로 성실하게 살았지만,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면서 일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이에 실업급여를 신청하나 복잡하고 관료적인 절차로 인해 실업급여 신청에 번번이 실패한다. 평생을 목수로 일했던 그에게 컴퓨터를 활용해 온라인으로 신청하는 절차는 매우 어렵고 생소한 절차이다. 안내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면 신청 양식이 있는 사이트를 알려준다. 해당 사이트에 접속하면, 양식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몰라 다시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어르신들처럼 컴퓨터를 쉽게 다루지 못하거나, 이런 용어들이 낯선 그 혹은 사람들은 결국 서비스에서 자연스럽게 소외된다.
다니엘은 질병수당도 신청하나 이마저도 기각되고 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상담 전화를 하나 전화 대기음인 비발디의 사계만이 들려온다. 전화를 연결하기 위해 대기하던 다니엘은 개똥을 치우지 않는 이웃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목공일을 하며 택배도 받는다. 축가 종가인 영국에서 축구 시간보다도 더 긴 관공서의 전화 연결 시간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함을 자아내게 한다. 영화는 중반까지 이러한 지독한 관료주의를 담담히 보여준다. 결국 다니엘은 실업수당에 기각되고 질병수당을 신청하였으나 떨어진다. 이제 남은 복지제도인 구직수당을 신청하고, 수당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현실에 쓸모도 없는 필수 교육을 수강하기도 한다. 그리고 구직활동하기 위해 걷고 또 걷는다. 이렇게 구직수당을 받기 위한 과정을 충실히 수행한 다니엘에게 구직센터에서는 구직활동을 한 것에 대해 증명할 것을 요구한다. 아날로그 세대인 다니엘은 자신이 손으로 주섬 주섬 작성한 이력서를 보여주나 담당자는 다니엘의 이력서는 증명서로의 효력이 전무하다. 결국 이력서 제출 기록 등을 증명하지 못한 다니엘은 4주 동안 수당을 제제 당해 막막한 삶을 살아내야 한다.
구직활동을 증명하는 것에 대해 처음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는 그들.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버스를 잘못 타 상담 예약 시간에 몇 분 늦은 케이티에게 지각 때문에 지원금을 삭감한다는 공무원들. 당사자는 고작 얼마의 지원금으로 인해 생존이 위협 받음에도 너무나도 쉽게 그들은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다. 이 수많은 비상식적인 공무원들의 태도와 일처리에 대해 답답해하고 화를 내는 다니엘의 마음이 곧 관객들의 마음과 동화된다. 결국 배려가 허용되지 않는 지독한 관료주의에서 다니엘의 몸은 결국 악화되고, 케이티는 아이들에게 음식을 주기 위해 자신의 몸을 매매한다.
영화에서 이들은 ‘차브(Chav)’다.
차브는 영국에서 가난한 하급 노동자를 부르는 경멸적인 단어이자, 범죄자를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영화 <킹스맨>*을 보면 매너의 나라 영국의 귀족들이 주인공 에그시를 무시하고 경멸한다. 에그시는 영화에서 전형적인 차브로 묘사되며, 차브는 게으르며 태생적으로 사회악인 존재로 규정된다. 당시 가난과 범죄의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다는 선언 아래 보수당은 하층민 범죄 등을 자극적으로 이용하였으며, 보수신문은 이를 보도하였다. 그 결과 가난한 하층민은 범죄자라는 사회적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영화는 관료주의에 물든 관공서와 공무원들의 태도 및 일처리에 대한 답답한 다니엘의 마음을 아니 수많은 차브들의 마음을 관객들이 동일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영화의 도입부를 보면 감독이 영화를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줄지 쉽게 알 수 있다. 오프닝 시퀀스를 보면 다니엘과 의료 전문가가 이야기 나누는 대화를 암전 된 화면으로 처리한다. 관객들은 둘이 나누는 대화를 오롯이 다 들어야 한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시작부터 다니엘의 마음에 감정이 이입된 채로 영화를 시작할 수 있다. 또한 영화에는 통화 연결음인 사계를 제외하고 그 흔한 OST 하나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의 답답한 마음이 관객들로 하여금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만든 감독의 의도는 분명 성공이다.
*2015년, 매튜 본 감독의 <영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대사가 유행하였다.
영화를 통해 관객들은 영국의 관료주의를 간접 경험하며, 한국에 살아가는 관객들이라면 분명 기시감을 느낄 수 있다. 한국에서도 다수의 국민들이 공무원의 관료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언론 표제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표현이 바로 ‘놀고먹는 공무원’*이다. 그렇다면 주민 센터에서 주민들이 자주 하는 표현은 무엇일까? 바로 ‘내 세금으로 월급 받는 주제에’이다. 영화처럼 사람들은 용무를 보기 위해 전화해도 관공서와는 통화하기가 힘들다. 힘겹게 연결이 되면 다른 곳으로 재 연결되고 또 한참을 기다린다. 이것을 우리는 시쳇말로 전화를 핑퐁 한다고 말한다. 주민 센터에서 들어가면 누구 하나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당연히 친절하지 않다. 서비스를 신청하기 위해 문의하면 용어가 너무 어려워 잘 알아듣지 못하겠고, 제출해야 하는 어려운 서류들이 많다. 특히 가장 슬픈 것은 복지 서비스에 혜택을 보려면 영화에서처럼 본인의 아픈 과거 혹은 마음에 있는 창피하고도 불편한 일을 스스럼없이 공무원에게 이야기해야 하며, 이를 서류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 즉 스스로 본인의 가난을 증명해야 한다. 이는 당사자에게 있어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임에도 관료사회에서는 배려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한국의 복지제도가 신청주의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도가 정해놓은 소득 등의 기준 선 안에 들어가야 신청할 자격 기준을 얻으며, 그 자격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신청주의의 문제점은 매우 많지만 대표적인 문제를 예로 들자면, 정책 혹은 서비스에 대한 정보의 미습득으로 인한 배제가 있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주인공 아이유는 사회 정책 등에 무지해 고생길을 걷는다. 특히 노인 장기요양 등의 혜택을 알지 못해 누워계신 할머니를 쇼핑몰 카트에 싣고 요양원을 탈출하고, 냉기가 흐르는 골방에 보살핀다. 드라마 후반부에 이를 해결해주는 사람이 바로 아저씨 이선균이다. 이처럼 신청주의에는 이렇게 큰 구멍이 있다. 이 종이에 구구 절절 기록하지 않아도 다수의 사람들이 한 번쯤은 겪어봤을 일이다. 결국 관료주의로 대표되는 공무원들은 세금을 낭비하는 불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숫자를 줄여야 하며, 그들의 철밥통을 부셔야만 할까?
2021년 2월 인천광역시 서구에서 신설한 구립 어린이집에서 장애 아동을 반 전체 교사가 학대한 사건이 있었다. 서구청에서는 즉각적으로 초기 대처를 진행했다. 교사들은 해고되었으며, 피해 아동들에 대한 후속 대책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피해자 지원은 매우 아쉬웠다. 먼저 학대를 받은 장애 아동들을 당사자와의 논의도 없이 지정된 어린이집 한 곳에 특수반을 개소하여 전원 조치를 하는 방법으로 대응하였다. 두 번째로 서구청은 심리치료를 위해서 이 역시 지정된 치료기관에서만 지원을 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지원방식의 문제는 장애아동은 특성상 심리치료를 위해서는 발달장애와 장애 정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과 각 아동들은 본인이 다니고 있는 치료센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새로운 곳에 가서 유대감부터 형성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는 것이다.** 왜 당사자들은 본인에 대한 피해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배제되었을까? 왜 피해자들을 세밀하게 살피고 그들에 맞는 대책을 세우고 지원하지 못했을까? 한편으로는 이렇게 세밀하지 못한 것은 공무원이 나태하거나 철밥통이기 때문에 발생한 일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예를 들면 얼마 전 입양한 아동을 학대해 숨지게 만든 부모의 잔혹한 사건을 시작으로 아동학대에 대한 이야기가 언론에서 크게 다루고 있으며, 다수의 국민들이 이에 분노하고 있는 현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2021년 2월 보건복지부에서 각 주민 센터로 아동학대 예방팀을 신설하라는 공문이 전달되었던 일이 있다. 국민들이 보기에는 손뼉 치고 격려할 일이나 공무원들은 박수를 칠만한 여력이 사실은 없다. 철밥통이라 불리는 공무원들은 업무와 민원***에 허덕인다. 주민들이 보기에 놀고먹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다. 주민 센터를 들어가면 맨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사실 공익근무요원이거나 자활근로자인 경우가 다수이기에 공무원들은 많은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이미 좋지 않은 이미지를 보유한 공무원들은 이미 화가 나서 전화하는 각종 민원들에 시달리기도 한다. 2021년을 지나는 현재, 모든 국민에 대한 정책을 현장에서 접수받고 진행하는 것이 바로 공무원이다. 점점 새로운 정책이 늘어나고 업무량은 많아지지만 사회복지직 공무원들은 늘어나는 업무량에 비해 인원이 비례하여 늘지 않는다. 또한 신청하면 누구나 받는 보편주의가 아닌 적당한 선을 정해놓고 그 선 안에 들어온 사람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정책들이 다수이기에 언제나 예외와 논란이 생성한다. 그 예외와 논란이 각종 민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또한 적당한 선 안에 들어왔다면 선을 증명하는 각종 서류들을 처리해야 한다. 사회복지직 공무원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재, 그들은 민원인들의 상황을 세밀하게 살필 수 없는 시스템 안에서 일을 하고 있다. 즉 공무원 개개인 혹은 그들 집단의 문제가 아닌 시스템의 문제가 크다.
*이에 대한 자료 혹은 기사 주소 등을 찾아 링크하려고 하였으나, 많은 양이 검색되는 표현이라 따로 링크 혹은 자료들을 적지 않았다.
**인천 서구청의 안일한 피해자 지원으로 인해 인천시장애인부모회를 비롯한 4개의 기관들과 장애부모들이 함께 모여 서구청 앞에서 추운 겨울에 기자회견을 진행하였고 이후 구청장과의 만남을 통해 부모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며 일단락되었다.
***상상을 초월한 억울하고도 답답한 민원들이 한번 이상 사회복지를 담당하는 각 공무원마다 매일 발생한다.
영국의 무너진 사회복지 시스템과 지독한 관료주의는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숨이 막히게 한다. 그들의 사회복지 시스템의 근간을 만든 자랑스러운 베버리지 보고서*는 어디에 어떻게 잃어버렸을까.
제2차 세계대전. 두 번의 세계 대전으로 인해 세계는 침음 하였다.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피해가 복구되기도 전 영국 국민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표를 던졌다. 영국의 전쟁 후 치러진 총선에서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 구호를 외친 노동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였으며, 노동당은 국민들의 염원에 반응해 복지국가의 기틀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두 번의 전쟁으로 정부의 재정이 좋지 않았음에도 질병과 실업, 노령 등에 어려움을 겪는 국민들에게 소득을 보장해주는 사회보험인 국민보험법, 무료 건강보험인 국민보건법, 가난한 사람을 살펴주는 국민부조법 등을 제정해 공격적으로 복지에 앞장선다. 특히 철도, 전기, 수도 등 주요 산업들을 국유화***하여 국가 세금 수입을 증대시켰다. 전쟁으로 어려운 시기에 합의에 기초한 정치와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애틀리는 국민들에게 자랑스러운 총리로 대표된다. 특히 이 모든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베버리지가 발표한 보고서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국의 복지 시스템은 근 30년간 유지되었으며, 1979년 ‘철의 여인’이라 불렸던 영국 사상 첫 여성 총리가 등장했다.
철의 여인. 당시 소련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주장했던 마거릿 대처에게 소련의 기자가 붙여준 별명이다.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은 영국이 1982년 포클랜드 제도를 아르헨티나로부터 탈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더욱 곤고해졌다. 이후 대처는 철의 여인답게 국유화된 주요 산업들을 민영화하였으며, 세제 등을 개편하는 등 복지국가의 체계를 ‘경제’의 부흥을 위해 변화시키는 정책****을 실행한다. 이 정책은 크게 4가지로 대표된다. 첫째, 기간산업의 민영화와 대폭적인 규제 완화를 통해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 체제에 뛰어든다. 두 번째로 세제를 개편한다. 역시 기업에 유리하도록 소득세와 법인세를 인하하였으며, 물건을 구입할 때 동일한 세금을 내도록 하는 부가가치세는 인상하였다. 세제 개편은 기업들과 고소득자에게 유리한 개편으로 평가받는다. 세 번째는 금융 서비스 산업을 장려하며, 금융 산업의 각종 규제를 과감히 완화하였다. 이는 훗날 금융규제 완화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한 나이젤 로슨 전 재무장관은 금융규제 완화가 결국 경제위기를 초래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진행한 정책은 노동조합의 파업권을 제한한다. 이후 대처는 노조들과 싸움을 시작하는데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답게 싸움에서 승리한다. 이후 철도와 수도, 전기, 통신 등이 민간 기업의 손으로 들어갔다. 대처의 이러한 개혁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격차를 크게 벌렸으며, 1946년부터 시작된 복지 국가로서의 기틀을 허물었다.
이러한 대처에 대한 평가는 영국에서도 극과 극으로 나뉜다. 2013년 4월 대처의 장례식이 국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약 55억 원 정도의 예산이 쓰였으며, 다수의 국민들은 나라를 망친 대처에게 혈세를 쓰는 것에 대해 반대 시위를 벌였다. 지금 다루는 영화 <다니엘 블레이크>의 켄 로치 감독은 대처의 국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대처의 장례식을 민영화하자.’
*윌리엄 베러리지 경의 이름을 따서 베버리지 보고서라고 알려졌다. 보고서는 무상의료, 완전고용, 가족수당, 그리고 광범위한 사회보험을 활용한 빈곤퇴치 계획 등을 제안했다.
**당시 노동당은 베버리지 보고서를 당의 중점임을 앞세워 선거에서 크게 승리한다.
***당시 전쟁으로 이미 주요 산업은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처리즘(대처주의)으로 불린다.
영화는 지독한 관료주의와 신청주의 시스템으로 힘들어하는 다니엘과 케이티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특히 케이티는 지각으로 인해 지원금이 줄어 생활이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먹을 것이 생기면 아이들에게 양보하고 묵묵히 굶주림을 참는 케이티. 그녀는 그렇게 4일을 굶는다. 이후 그녀는 푸드뱅크에서 음식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되어 다니엘과 함께 방문한다. 음식을 고르던 케이티는 배고픔에 자신도 모르게 깡통을 따서 손으로 허겁지겁 먹는다. 주의 사람들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놀라고 그녀 또한 자신의 모습에 놀라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런 그녀를 다니엘은 위로한다. 영화는 케이티의 푸드뱅크 방문 장면을 보여주며 두 가지의 메시지를 전한다. 영화 내에서 다니엘과 케이티를 비롯한 소위 차브들은 대중들에게 놀고먹으며 돈을 타내는 사람으로 내내 비친다. 하지만 그들의 삶 이면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영화를 통해 증명한다. 또 하나 감독이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이 장면에 숨어있다. 관료주의에 물든 사람들은 국가 제도의 비인간성에 숨어 가난한 사람들을 모욕 주는 시스템으로 무장하여 그들을 상처 입힌다. 그러나 푸드뱅크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차브들이 와서 음식을 배급받는 시스템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케이티의 처지를 배려하며 푸드뱅크 음식을 지원이나 도움이 아닌 ‘쇼핑’이라고 표현을 한다. 또한 직원이 마치 점원이 되어 쇼핑하는 케이티를 도와 물건을 하나하나 살펴주며 쇼핑 주머니에 담아준다. 감독 켄 로치는 가난한 사람들도 그들의 삶이 있고, 존중을 받아야 하는 인격체라는 사실을 이 장면을 통해 강조한다. 평소 스테디 캠*을 사용하지 않는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스테디 캠을 사용하여 푸드뱅크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많은 시간을 공들여 비춰준다. 즉 차브들로 카테고리화 되어 있는 사람들이 아닌 한 명 한 명 모두 그들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자존감이 있는 인격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감독은 관료들을 악인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보통의 영화는 안타고니스트**를 설정하고, 그들의 악행에 관객들이 감정 이입하게끔 만든다. 그렇기에 주인공이 안타고니스트를 물리치거나 혹은 해결하면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진짜 안타고니스트는 비인간화된 시스템인 것이다. 만약 관료들이 안타고니스트라면, 악당들에게 핍박을 당하는 주인공들로 묘사되기 때문에 그들과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비인간화된 시스템에 대해서 관객들은 전혀 알아채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야기로 감독은 다니엘이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듣는 강의에서도 이야기되어진다. 강사는 이 강의를 듣는 사람들을 향해 노력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 즉시 다니엘은 강사에게 항의한다. 감독은 이들이 실업 급여를 받는 것은 눈먼 돈을 타내기 위한 차브들이 아닌 것이다. 즉 이들의 가난한 삶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시스템의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얼마나 영국 사회 내에 일자리가 부족한지, 전통적인 노년 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지식 격차를 줄이기 위해 사회적으로 어떤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는지, 급변하는 사회 속에 안정망은 어떻게 작동되는가에 대한 물음이자 사회적 외침이다.***
*카메라를 삼각대에 고정시키지 않고 들고 촬영할 때 카메라가 흔들리는 것을 방지해주는 신체 부착용 특수 받침대를 말한다.
**주인공과 대립되는 인물. 보통은 악당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실제로 영국은 도시에 따라 사람들이 삶을 살아내는 격차가 크다. <죽어도 선덜랜드>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이미 쇠퇴해버린 도시에 사람들의 유일한 낙이자 도시를 지탱하고 있는 매개체로 선덜랜드라는 축구단을 조망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선덜랜드 축구단의 순위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선덜랜드는 단순한 축구단이 아닌 사람들에게 도시의 경제와 사람들의 삶을 책임지는 막중한 사명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처럼 사회적 안정망이 부실한 상황에서 쇠퇴한 도시의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다큐멘터리를 통해 살짝 엿볼 수 있다. 넷플릭스에서 감상할 수 있다.
지독한 관료주의와 신청주의 시스템에 맞서 한 걸음씩 내딛는 블레이크. 그는 컴퓨터와 인터넷을 사용해본 적이 없어 마우스를 화면에 가져다 대는 전형적인 우리 사회의 퇴물로 취급되는 사람이지만, 케이티 집에 고장 난 부분을 쉽게 해결하고 고치는 전문가이기도 하다. 다니엘에 옆집에 사는 막스 밀리언. 그는 청년 실업을 대표하는 인물로 묘사되는데 중국에서 신발을 구입해 불법으로 판매하며 삶을 근근이 살아가는 인물이다. ‘차이나’라고 불리는 청년은 다니엘의 인터넷 문제를 해결해주고 그 둘은 나이차를 넘어 친구가 된다. 이처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필요를 조건 없이 채워준다. 인간이 인간을 돕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가치를 감독은 비인간적인 시스템과 칼날 같은 절차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며 우리에게 보여준다. 무엇이 바른 가치이며,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
다니엘은 사회복지 시스템에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자 결국 질병수당을 받기 위해 항고를 하기로 선택한다. 다니엘을 돕던 앤은 다니엘에게 항고 일을 배정받는 것이 오랜 시간이 걸리니 수당 신청자로 남아 있기를 권유한다. 하지만 다니엘은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는다며 거절한다. 그 후 다니엘은 센터 벽에 스프레이로 낙서를 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 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요구한다. 그리고 상담전화의 구린 대기음도 바꿔라’
다니엘의 갑작스러운 낙서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호응하고, 그를 응원한다. 그를 제제하려는 경찰과 센터 사람들과 응원하는 사람들을 교차로 보여주며 마치 우리에게 선택의 결단을 내릴 것을 요구하는 듯하다. 특히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시작하는 낙서는 공식적인 문서에 사용하는 작성법으로 시작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즉 공적인 언어에 해당한다. 즉 ‘복지는 나의 권리이며, 시민의 권리다’라고 말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
(*스포 주의)
항고일. 다니엘의 담당의사와 치료사는 관료들의 결정에 매우 분노하고 있었다. 센터는 나름대로 반론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 다니엘은 화장실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잡아보지만, 결국 긴장감에 쓰러지고 만다. 영화는 바로 다니엘의 장례식 장면으로 전환된다. 다니엘의 죽는 장면을 영화는 의도적으로 생략하는데, 이는 관객들이 다니엘의 죽음에 감정을 소비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 같다. 관객들은 한 사람의 죽음에 감정적으로 눈물을 흘리고 극장에 나와 좋은 드라마 한 편을 감상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계속 이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함으로써 영화가 주는 메시지에 주목하기를 원했다고 보인다.
다니엘의 장례식. 오전 9시의 장례식은 가난뱅이들의 장례식이라고 한다. 케이티는 항고에서 읽으려고 했던 다니엘의 메모를 천천히 집중하여 읽는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등록 번호도, 화면 속의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무너진 사회적 안전망. 찬란했던 복지의 나라 영국은 ‘경제’라는 이념 아래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품으며 개조된 사회 시스템은 결국 가난한 사람들을 모욕 주는 시스템으로 변질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은 지금 어떠한가. 아마도 머나먼 영국의 이야기가 공감되었을 것이다. 우린 그들과 결코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아직 영국과 달리 앞으로의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다. 복지 선별주의와 보편주의 사이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유승희 전의원은 예전 인터뷰에서 아동 수당 정책 초기에 전체 아동의 90%에게 줄 것인지, 70%를 줄 것인지 의견차가 있었다고 한다. 결국 90%의 인원에게 주기로 결정되었는데, 90%의 인원만 10만 원씩 지급하기 위해 나머지 10%를 선별하는 행정 비용이 약 1,626억 원이 소비된다. 이는 나머지 10%의 인원을 나눠주면 오히려 남는 금액이라 모든 아동에게 주기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행정비용과 절차를 고려하면 보편적 복지가 오히려 효율적이며, 낙인효과까지 없앨 수 있다. 또한 사각지대를 없애는 장점도 있다. 그리고 이미 한국은 코로나로 인해 기본소득의 개념까지 퍼진 지금,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기점이 온 것 같다.
* 송우진, 이동진의 무비썸 인용
어쩌면 사람의 자존감을 무너지게 만드는 비인간적인 시스템은 사실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저 포스터에 고여 있는 웅덩이처럼 그저 우리는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다. 그저 뛰어넘을 마음과 준비가 되었다면, 이제 뛰어넘는 행동을 하면 된다. 흙탕물이 튀어 바지가 더러워질 수 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뛰어넘어 목표를 향해 그저 걸어가면 된다. 흙탕물이 더러워, 바지가 젖을까 두려워 길을 가지 않을 것인가?
------- 영화가 끝난 후.
베버리지 보고서로 영국이 변화되는 시기, 보고서를 만든 베버리지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개혁에 양가감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국가와 민간 봉사조직 둘 다 강력한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한 것과 달리 국가가 점점 더 큰 역할을 떠맡는 것을 보고 이를 경계했다. 모든 서비스를 공무원이 담당하게 될 것임을 알아챈 베버리지는 ‘솔직히 등골이 오싹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민간 자선단체들이 사회복지 서비스 전달에서 일정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음을 제안했지만, 노동당 정부는 그 제안을 기각했다고 한다.
베버리지에게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힐러리 코텀 지음, 래디컬 헬프, 착한책가게, 2020.11.12. 4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