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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Dec 09. 2019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

 살면서 건배사를 궁리해 본 일이 없다. 누군가 오래 고민한듯한 건배사를 들으며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도 실없는 건배사를 만들어내는 걸까 생각하지만 술을 좋아하는 나는 늘 그 인위적인 친근함에도 웃게 된다. 나는 취하지 않은 채로 건배사를 자청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나에게도 자주 하는 건배사가 있다. 바로 "사랑합니다!"이다. "사랑합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각기 다른 술이 담긴 유리잔들을 창! 하고 부딪히고 나면, 사실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약한 관계도 오래오래 지속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근사한 사람이 된 기분. 사랑을 사랑할 줄 아는 멋진 사람이 된 기분. 불빛과 사람과 건배사로 가득한 연말연시는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게 되는 때이니까.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 그것을 배운 지 오래되지 않았다.


 "사랑해."라는 말을 가르쳐 준 사람이 있다. 그 사람과 나는 도통 만날 수 없는 동떨어진 세상에서 살다가 아주 우연히 만났고 그렇게 우연히 아주 오래 함께하게 되었다. 사랑이 영화나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 실제로 굉장히 단단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를 통해 알았다. 노래 가사나 영화의 대사, 소설의 문장에 담긴 유치한 사랑 이야기가 과장이 아니라 사실임을,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생생하다는 사실을 몽땅 다 그를 통해 경험했다. 좋아한다는 말도 하기 전에 손을 잡았던 그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고 싶지 않아 했다. 좀처럼 사랑한다고 말할 줄 모르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우리 아침, 점심, 저녁 이렇게 하루 세 번은 꼭 사랑한다고 말하기로 하자."


 나는 그로 인해 사랑한다는 말에 익숙해졌다.


 내가 키우는 강아지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나의 강아지는 자신의 시력이 점차 사라지고 있음을 모른다. 아직은 나의 냄새가 아닌 나의 생김새를 알아차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엄마와 함께 브런치를 먹다 엄마의 얼굴을 보며 망연해진다.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엄마에게 화를 낸다. 엄마는 그런 나를 위해 싱그런 토마토를 지퍼백에 담아준다. 평생 미웠던 아빠가 나에게 못 하는 말을 엄마를 통해 건넨다. 그럼에도 여전히 너무 미운 아빠가 점점 더 이른 시간에 눈을 뜬다. 자신보다 젊은 가족들이 깰까 아주 작은 소리로 라디오를 튼다. 공학도인 아빠가 스마트폰의 음성인식 기능을 사용하며 혼잣말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신문의 작은 활자들을 하나하나 정독한다. 그것은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함일까 싶어 마음이 아파진다. 삶의 뒷모습은 그런 활자들을 정독하는 중얼거림이 아닐까 하고. 나는 아침 일찍 출근하며 괜스레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다녀올게요."라고 중얼거려보았다.


 사랑하고 싶다.


 이제는 나의 옆에 없는 옛 연인이 했던 말처럼 누군가에게, 하루에 세 번은 사랑한다고 말하자고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사랑하는 일만큼 멋진 일이 있을까. 금색 리본, 빨간 열매, 초록과 빨강의 대비, 종소리, 하얀 눈, 노란 불빛, 온통 반짝거리는 것들. 한 해의 끝과 시작은 사랑을 노래한다. 가장 추운 계절에 가장 따뜻하길 기대하며. 징글벨 징글벨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최근에 사랑하게 된 노래가 있다. 이 노래를 사랑하게 된 이유는 이 가사 때문이다. "Like a life without love, God, that's just insane. But a love without life, Well, that just happens every day."*


 그래서 오늘 당신에게 이 말을 꼭 해야겠어요. 삶을 떼어놓은 사랑, 오 그것은 매일 일어나는 일이지. 나는 사실 당신을 아주 아주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사랑합니다.



Current Joys, 「A Different Age」, 『A Different Age』,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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