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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Apr 20. 2020

나는 못해요

 유치원의 재롱잔치 날, 무대에서 나를 보고 있는 수많은 엄마 아빠들 앞에서 장래 희망을 발표했던 적이 있다. 나는 예쁜 한복을 입고 장래 희망이 뭐냐는 질문에 "의사."라고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의사라는 직업을 희망하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위인전을 읽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돈을 받지 않고 고쳐준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갈 일이 생기면 꼭 여자가 의사로 근무하고 있는 병원에 갔다. 여전히 흔하지 않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병원을 찾기가 더 힘들었다. 엄마는 병원에 다녀오고 나면 여자도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지원아, 오늘 봤지? 여자도 의사가 될 수 있다. 오늘 의사 선생님 정말 멋졌지?" 점점 의사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꼭 의사가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시절 과학자나 외교관으로 장래 희망이 바뀌기도 했지만 나의 장래 희망은 재롱잔치 이후로 의사로 굳혀졌다. 지금은 크리에이터가 초등학생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이지만 그때만 해도 의사나 과학자, 선생님이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이었다. 선생님만은 되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교사로서 아주 뿌듯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단 한 번도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가끔 나를 웃게 만든다.


 의사라는 꿈이 애석하게도 어렸을 적부터 수학에 재능이 없었다. 그래도 나름 우등생이었던 나는 한동안 열심히만 하면 어느 정도 높은 수학 점수를 유지할 수 있었다. 글쓰기를 좋아했던 나의 장래 희망이 고등학교 시절 잠시 작가로 바뀌기도 했는데, 부모님은 항상 내가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 나는 아빠가 버린 고장 난 노트북을 가지고 남몰래 유치한 소설을 써 내려갔다. 소설을 인터넷에 올리면 사람들이 좋아했고 나는 기뻤다. 엄마는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든 부직업으로 글을 써서 책을 낼 수 있다고 나를 설득했다. 나는 작가라는 나의 꿈을 '어떤 내용으로든 내 책을 내는 것'으로 축소했다.


 의사가 되어야 했기에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이과와 문과 중에서 이과를 선택했다. 지금은 다르겠지만 그때는 이과와 문과의 구분이 엄격했다. 나는 국어보다는 수학에, 사회보다는 과학에 더 열중해야 했고 이전보다 훨씬 더 어려운 수학을 배워야 했다. 고작 10대인데 미분과 적분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가혹하게 느껴진다. 이과에서 배우는 수학은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수학 성적은 1학년 때와 비교할 수 없이 떨어졌고,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수학이 평균점수를 몽땅 깎아내렸다. 최선을 다했지만, 노력에 비교해 점수는 오르지 않았다.


 수학에 힘들어하던 그 시절 나는 소문을 따라 '이지 학원'이라는 곳으로 학원을 옮겼다. '이지'라는 말이 어떻게 학원의 이름이 되었는지 몰랐지만 그 이름이 좋았다. 그 시절 나의 별명은 나의 이름을 딴 '이지'였고 그 이름에 따라 모든 것이 쉬워질 것 같았다. 오래된 학원의 유명한 선생님이 야심 차게 연 곳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기대와 달리 결과는 좋지 않았다. 학원을 옮겼음에도 수학 점수는 오르지 않았다. 다만 즐거웠던 기억이 하나 있는데 국어 수업에서 문학 노트를 만들던 일이다. 수능을 준비하기 위함이었지만 다양한 단편소설의 줄거리와 주제를 정리하는 문학 노트를 만드는 일은 나의 힘겨운 일상 속의 낙이었다. 나는 빨간 체크무늬의 단단한 노트 안에 '메밀꽃 필 무렵' 같은 한국 고전 문학을 정리했다. 때로는 흥미로운 현대문학도 섞여 있었다. 문학 노트를 정리할 때 나는 또박또박 모든 글자를 최대한 느리게 적어 나갔다. 물론 좋아하는 문학 노트만큼이나 나의 발목을 붙잡았던 수학 오답노트에도 정성을 쏟았다. 오답노트를 쓸 때면 틀린 문제를 다 해결한 기분이 들었는데 비슷한 수학 문제를 만나면 나는 도돌이표처럼 벽에 부딪혔다.


 아직도 고마운 일로 남아있는 일화가 있다. 수학 점수를 도통 올리지 못하는 나를 두고 '이지 학원'의 원장 선생님과 상담을 한 엄마에게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열심히는 하는데... 점수가 왜 안 오르는지 모르겠네요."

 나는 이 말을 듣고 내내 나를 괴롭히던 수학을 포기할 수 있었다. 오르지 않는 수학 점수가 나의 노력과 상관없었음을 인정해준 말이었기 때문이다.


 미분과 적분에 적응하지 못한 수많은 이과 학생들이 진작 문과로 방향을 바꾼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나는 뒤늦게 이과 수학을 포기했다. 오려 붙인 문제와 형광펜으로 그은 밑줄과 별표와 물음표로 가득한 오답노트를 버리며 속이 시원하기도 했지만 슬프기도 했다. 그간 해온 나의 노력이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수학 점수도 올랐다. 당연히 의사는 되지 못했다. 엄마는 여전히 의학 드라마를 볼 때면 자신의 딸이 의사가 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말한다. 사실 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되지 못한 것인데 말이다. 그게 엄마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미련 때문임을 알고 있다. 이제 그런 엄마의 말에 개의치 않을 줄 안다. 나는 교사로서의 30대를 맞이했고 얇은 책도 한 권 내었으니 작가라는 꿈도 이룬 셈이다. 그리고 지속해서 쓰는 삶을 살겠다는 장래 희망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임용시험을 앞두었을 때 나는 "너라면 꼭 붙을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이 싫었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좋은 의도였겠지만 그 말이 합격이라는 성과를 이루지 못한 미래의 나를 힐난하는 듯했다. 열심히 해도 도무지 올릴 수 없었던 수학 점수처럼. 나는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합격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말을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중요한 일을 자신의 영역 안에서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이에게 함부로 "잘 될 거야."라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삶에는 열심히 해도 잘 안 되는 일이 너무 많다. 잘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잘 안 되어도 충분하다. 나에게는 체크무늬의 문학 노트와 이지 학원 선생님이 걱정스레 건네주었던 말이 남았으니까. 그것은 90점 이상의 점수보다 더 정확하고 확실한 것이니까.


 창밖을 내다보니 어제 보였던 선명한 달이 보이지 않는다. 어제는 고개를 조금 힘겹게 내밀었을 때 보였으니 오늘은 아마 내가 볼 수 없는 곳으로 자신의 자리를 옮겼을 것이다. 아니면 오늘은 그저 구름이 조금 많은 날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볼 수 없을 뿐 달은 어딘가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겠지. 지구의 자전에 따라 공전하며 매일 위치와 모양을 바꾸는 달처럼 그렇게 내가 가능한 모양으로 있을 수 있는 곳에 있으면 된다. 여전히 도전적인 일이지만 언젠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니요, 나는 못해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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