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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Apr 13. 2020

오늘의 달리기

 동생이 얼마 전 5년여간의 제주도 생활을 정리하고 육지로 돌아왔다. 동생은 처음 제주도에 뚜벅이로 여행을 갔다가 제주와 사랑에 빠졌다. 몇 시간 동안 아무도 없는 아름다운 길을 걷고 또 걷다가 언덕을 넘고 또 넘어 겨우 어딘가에 닿고는 했다는 동생은 제주의 바다도 사랑했지만, 돌과 이끼와 오름과 중산간의 풍경을 더 사랑했다. 삶이 아파 섬으로 도망쳤던 동생은 그 모든 게 무슨 대수냐는 듯 삶을 압도하는 자연을 마주하며 위로를 얻었다. 나는 그때 동생이 겪었던 아픔을 감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이 제주도에 머무는 동안 자주 그 멋진 섬에 찾아가 그곳을 함께 누렸다. 이른 봄에는 동생이 오래된 집을 개조하는 모습을 보았고, 여름에는 사람이 없는 얕은 바닷가에서 밤 수영을 하다 해가 뜨는 모습을 보았고, 가을에는 알려지지 않은 근사한 오름에 올라 다른 수많은 오름을 내려다보았으며, 한겨울에는 폭설이 내려 야자나무와 바닷가 위에 눈이 쌓인 풍경을 보았다. 동생만큼은 아니더라도 제주도와 사랑에 빠졌던 시간이었다.  


 제주도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동생은 오래된 집 옆의 돌담 창고를 개조해 작은 가게를 만들었다. 내가 동생을 멋지게 생각하는 만큼이나 멋진 가게였다. 가게 이름은 '시간의 무늬'. 가게에서 동생은 쓸모없고 아름다운 오래된 물건들을 팔았다. 작은 마당의 텃밭에서는 동생이 가꾸는 갖가지 식물이 자라났다. 창고 옆에 심은 덩굴나무는 아주 멋지게 자라나 돌담의 반을 뒤덮었다. 옆집 할망네 집 개 럭희와 장군이가 가게에 자주 놀러 와 덩굴 위를 뒹굴었다. '시간의 무늬'의 사계절은 모두 아름다웠는데 육지보다 장마가 더 오래가는 제주도에서 비 소식이 끝날 줄 모를 때에는 창고 옆의 무성한 녹색이 한층 더 짙어졌다. 그 녹색에서는 짙푸른 냄새가 났다.


 동생은 그 모든 것을 정리하고 5년 만에 섬을 떠났다. 떠나는 날 옆집 할망과, 직접 노동을 하며 개조한 돌담 창고에 가득했던 아름답고 쓸모없는 물건들과, 정성껏 기른 덕에 멋지게 자라준 덩굴나무 그리고 야자나무와, 마당에 놀러 와 배를 보이던 럭희와 장군이와, 여름이면 벌레가 잔뜩 출몰해 힘들었던 오래된 집과 인사를 나눴다. '시간의 무늬'는 영업을 종료했지만 동생은 머물렀던 자리에 또 다른 무늬를 남기고 왔을 것이다. 그곳을 지나쳤던 사람들의 마음에도. 동생이 지내던 기간의 제주도가 나에게 그랬듯이.


 삶을 살면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소유할 수 없다. 계절이 왔다가 가고 좋아하던 시간이나 공간이 없어진다. 사람들과 오래 끌어안았다가 헤어지고 애정을 쏟았다가 그 마음을 잃는다. 나의 의지나 노력과 상관없이 하루하루 소모되어가는 아프고 아름다운 것을 누리며 매일을 산다. 어김없이 4월이 찾아왔고 어김없이 애를 쓰며 살고 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산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최근에 달리기를 시작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소유할 수 없지만, 삶의 소유자로서 매일 달리기를 하기로 결심할 수는 있으니까. 하루에 30분이 목표이지만 25분에서 30분 사이에 달리기를 포기할 때가 많다. 15분쯤 되면 달리기를 멈추고 싶어지기 시작한다. 달리기가 즐거움에서 고통으로 변하는 지점을 지나야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어쨌든 그래서 적어도 15분은 충분히 넘게 달리려고 노력한다. 그 날의 저조한 성과나 기울어진 기분과 상관없이 오늘 저녁에도 달리기를 할 수 있구나, 깨달을 때면 일련의 일로 인한 슬픔이 가시고는 한다. 하루하루를 잘 살아내고 있는 셈이다. 고작 달리기 하나로.


 달리며 매일 다른 풍경을 마주한다. 오늘의 달리기를 하면서 나는 그늘진 운동장에서 부는 바람, 15년 된 타일 벽화와 아직 덜 핀 벚꽃의 색, 자전거와 씽씽이를 타는 아이들과 꾸준히 걷는 사람들, 그리고 홀로 농구대에 공을 던지는 사람과 커다랗고 잘생긴 까만 강아지와 함께 역동적으로 공놀이를 하는 사람을 보았다. 그 안에서 15분 정도부터 멈추고 싶어 하다 오늘은 꼭 29분이 아니라 30분을 뛰겠다고 생각하며 기분이 좋아졌다. 모두가 즐거워지기 위해 애쓰고 있어 삶이라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행복하지 않더라도 '아, 좋다.'라고 잠깐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정도가 어쩌면 우리의 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한 4월이 왔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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