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원 May 04. 2019

조팝나무꽃이 피는 5월

 할머니의 생일은 5월 5일, 어린이날이다. 비록 음력이지만 우리 가족은 의례적으로 할머니의 생일을 음력이 아닌 5월 5일에 챙기고는 했다. 그래서 나는 매해 어린이날에 할머니 생각을 한다.


 할머니와의 기억이 많다. 모두 다 좋은 기억은 아니다. 할머니는 때때로 모질었고 종종 이해하기 어려웠다. 할아버지는 아빠가 세 살 때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아빠가 다니는 학교 앞에서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팔았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부터 할머니는 허리가 직각으로 굽어 있었다. 나는 전래동화에서 읽었던 것처럼 모든 할머니가 그런 줄로만 알았다. 성인이 되어 할머니 집에 놀러 갈 때면 환한 대낮에도 할머니는 몇 번이고 포기하지 않고 늦었으니 자고 가라고 하셨다. 지금에 와서는 하룻밤 자고 가는 게 왜 그리 어려웠을까 싶지만 그때는 그게 너무 싫었다.


 나는 죽음을 할머니를 통해 처음 경험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둘째 큰아빠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계신다."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사람이 죽은 모습이 아닌 '죽고 있는' 순간을 똑똑히 목격했다. 늘 꼬장꼬장했던 할머니가 눈을 감고 있던 며칠간 나는 할머니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눈을 뜨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가 가진 살의 색깔이 죽음의 빛깔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람의 삶은 이렇게 끝이 나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사람은 죽으면서 작아진다. 나는 할머니의 얼굴이, 손이, 다리가, 어깨가 작아지는 모습을 마음껏 울지 못하는 채로 계속 바라보았다. 어떤 아픔은 도무지 실감할 수가 없어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의 마지막 생일을 할머니와 함께 보냈다. 생일과 마지막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지만 마지막 생일은 삶에 아주 분명하게 존재한다. 할머니의 마지막 생일은 그러니까 당연히, 만물이 온통 새롭게 돋아난 녹색으로 뒤덮인 5월이었다. 직각으로 허리가 굽어서 걷기 어려웠던 할머니는 휠체어를 탔고 나와 동생이 돌아가며 휠체어를 밀었다. 날씨가 무척 좋은 날이었다. 우리는 뜨거운 5월의 햇살을 맞으며 한강의 공원을 산책했다. 그날 나는 살면서 할머니가 어린이처럼 웃는 모습을 가장 많이 보았다. 그날만은 할머니가 됐다며 손사래를 치는 일도, 불필요한 모진 말을 내뱉는 일도 없었다. 할머니의 기분이 무척 좋다는 것을 우리 모두 느낄 수 있었고, 할머니가 우리와 함께 그런 기분을 공유하는 일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봄의 꽃이 대부분 져버린 5월, 한강 변에 잔뜩 심긴 조팝나무에는 뒤늦게 하얀 꽃이 만개해 있었다. 나는 그 하얗고 작은 꽃의 이름을 그때 처음 알았다. 조팝나무꽃. 너무 작아 초라해 보일까 조급하게 한데 모여 핀 꽃을 조금 꺾어 할머니의 귀에 꽂아 드렸다. 평소라면 거친 목소리로 하지 말라고 나무랐겠지만, 그날 할머니는 꽃을 귀에 꽂고서 환하게 웃었다. 나는 여전히 그 웃음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조팝나무꽃의 꽃말은 '하찮은 일'이다. 나는 할머니가 마지막 생일에 귀에 조팝나무꽃을 꽂고서 지었던 웃음처럼 하찮고 아름다운 일에 대해 생각했다.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하나씩 견딜 때, 그렇게 견디는 삶의 의미를 묻다 결국 모든 것이 '무'로 수렴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가 누리는 삶은 모두 그 하찮기 그지없는 아름다움에 있지 않냐고. 5월, 햇살이 잔뜩 든 버스 안에 둥둥 떠다니는 꽃가루가 마음에 던지는 감정처럼 찰나에 불과한 것들. 그리고 오늘도 하찮고 아름다운 것이 내 삶에 남아 있어 주어서 다행이다.

이전 06화 너는 둘째날 나에게 북엇국을 끓여주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