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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Jun 08. 2020

너는 둘째날 나에게 북엇국을 끓여주었다

 너와 만난 지 이틀째 되는 날 너는 나에게 북엇국을 끓여주었다. 막 일어나 마구 솟은 머리카락 때문에 한 뼘이나 키가 더 커진 채로, 조금은 작아 보이는 흰 티셔츠를 입고서 너는 또각또각 채소를 썰었다. 늦은 아침 살짝 무겁게 가라앉은 햇빛이 네 등 뒤에 놓여 있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아, 어떻게 이런 사랑이 내게 찾아왔지.’라고 생각했다.     


 나는 너와 자주 함께 여행을 떠났다. 우리의 사랑은 안동의 한 고택에서 시작되었다. 화장실이 밖에 있던 조금 불편한 고택의 처마 아래에 앉아 청포도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고 별을 보았다. 고택 뒤의 오르막길을 조금 오르면 하회마을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 있었다. 하회마을을 내려다보며 우리는 조금 속 깊은 대화를 나눴고 너는 내 손을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초록색 잎사귀가 많았던 아무도 없는 그 장소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한겨울 아무도 없는 강원도의 아주 차가운 개울가에서 함께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했다. 차가운 날씨만큼 하늘이 청명했고 빛을 받아 얕은 개울물이 반짝반짝 빛났다. 우리는 오들오들 떨면서 얇은 옷차림으로 그곳에 조금 오래 앉아 있었다. 그날 우리는 근사한 강원도의 미술관에서 완벽한 하루를 보냈다.


 대전에서는 ‘도시여행자’라는 서점 겸 카페에 자주 갔다. 우리는 그 도시를 자주 여행했기 때문에 서점의 이름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서점 앞에는 정말 맛있는 치킨집이 있었는데 치킨집의 이름은 무려 ‘서울치킨’이었다. 양념치킨보다 프라이드치킨이 훨씬 더 맛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도시여행자’에 갔다가 ‘도시여행자’라는 간판을 보며 인기가 많은 프라이드 치킨을 위해 긴 시간의 웨이팅을 견뎠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사방으로 열린 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하루는 ‘도시여행자’의 2층에서 여행책을 읽으며 라오스 여행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너는 생각보다 철저하게 여행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 사실이 조금 불필요하게 여겨지면서도 기쁘고 좋았다. 방비엥에서 숙소 아주머니의 추천에 따라 사우나를 하고서 살짝 젖은 머리로 해 질 녘 거리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던 일이 여전히 생생하다. 열대국의 나무가 가진 넓은 잎과 낡은 거리가 만들어내던 여느 다른 이국보다 더 이국 같았던 풍경.     


 라오스에서 태국으로 넘어간 우리는 카오산 로드에서 헤나를 하고 시끌벅적한 맥줏집에 갔다. 맥주가 딱히 맛이 없었는데도 우리는 꽤 많은 양의 맥주를 마셨다. 너는 기분이 좋아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고 나는 그런 네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질투가 나고 조급해졌다. 우기를 지나는 동남아의 공기가 무척 습하고 더웠던 밤이었다. 너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완벽한 사람이었다.     


 내 삶을 통틀어 가장 뜨거웠던 5월에 나는 너와 헤어졌다. 어느 촌스럽고 다정한 카페 앞에서였다. 초록색 반바지에 샌들을 신고서 나는 5월인데 발등이 너무 뜨겁다, 겨우 5월인데 이별하기에는 너무 뜨거운 날이라고, 그리고 이제는 너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5월이 여름을 준비하기에는 너무 이른 것처럼, 이별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고.     


 지난 주말에 무작정 차를 타고 광주에 다녀왔다. 순전히 멀리 떨어진 곳에 가고 싶어서였다. 한참을 달리며 정말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옥수수를 사 먹었다. 어쩐지 여행 중에서 그 순간이 가장 좋았는데,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닌 확실한 ‘여행 중’의 순간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시 한참을 달려 다시 집에 도착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행에서 남은 순간은 고작 옥수수뿐, 삶에서 도착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 어딘가에 도착해도 다시 어딘가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 더는 내 곁에 없지만 너는 둘째 날 나에게 북엇국을 끓여 주었다. 그 뒷모습은 그곳에 그대로 고스란히 남았다.      


 결국 삶은 사랑의 결과가 아닌 사랑의 감정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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