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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Dec 03. 2019

매일을 수리하는 일

 아침에 밤새 떨어진 낙엽을 쓸어 담는 사람과 고속도로 한복판의 절벽 위에서 무언가를 공사하는 사람을 보았다. 어떤 날 아침에는 희미하게 벗겨져 있던 차선이 선명해져 있기도 했고, 너무 많은 배추를 실은 트럭이 아주 느리게 고속도로를 달리기도 했다. 그 광경을 보며 누군가의 아침을 수리하는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대학교 1학년 때 학교 계단을 내려가다 면접을 보러 온 고등학생들을 본 적이 있다. 이미 내가 지나온 길을 똑같이 지나오게 될 그들을 보며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교묘한 감정에 휩싸였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초조함을 알면서도, 그 초조함 뒤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조금은 알아챘기 때문이었을까. 삶은 살아가기보다는 살아내는 것이고, 시험은 끝나지 않고 반복된다는 것을. 그리고 질문의 정답도 모른 채 끊임없이 채점하거나 채점 당하는 삶의 아이러니를.


 그로부터 10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종종 그때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 아직 나보다 덜 살아낸 존재들이 버스정류장 같은 곳에 서서 유치한 이야기를 하며 다소 과장되게 폭소를 터뜨릴 때, 상기된 얼굴로 열정적인 수다를 나눌 때, 작은 반항 같은 것을 하며 만족스러운 표정과 몸짓을 할 때. 그런 모습을 보며 나는 안타깝지만 부러운 마음이 든다. 너는 긴 시간을 견디게 되겠지. 그중 어떤 것은 몹시 아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지. 그렇게 어떤 불행과 아픔을 넘기고 나면 어디엔가 닿는 게 아니라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하나의 시험을 넘기고 또 하나의 시험을 마주할 때마다 무엇이든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들어내어 진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항상 누군가를 만나게 되겠지. 많은 것이 찬란해서 자주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행복에는 끝이 있음을, 어떤 행복을 보내고 나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는 사실도.


 여전히 끝난 일은 하나도 없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넘기지 못한 일은 없었다. 그중 대부분이 아팠고 기뻤다. 엉망인 척 엉망이 아닌 모습으로 뒤섞여 서 있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와 단 한 그루밖에 없는 버드나무, 벌거벗었거나 아직은 노란 잎이 무성한 은행나무, 그런 나무들이 모여 매일, 매 계절, 매해 다르게 만들어내는 풍경처럼 근사했다. 


 낙엽을 쓸거나 고속도로 한복판의 무언가를 공사하며 세상을 살아내는 일을 생각한다. 목적이 있는 일의 목적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목적이 없는 일에 목적을 부여하기도 하면서 결국은 어떻게든 세상에 보태어지는 일.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끝내는 일. 그렇게 매일을 살아가는 동안 늘 그랬듯 비슷한 양의 나쁨과 기쁨이 축적되어 올해도 어김없이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새해가 찾아오는 일과 별개로 한 해가 저무는 일은 슬픈 일이다. 그럼에도 더 슬프고 기쁜 일은 우리가 그 모든 것을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팔 할은 시간의 힘이지만 그 외에는 오롯이 우리의 의지로.


 어둠이 속수무책으로 예쁘게 지는 저녁, 겨울 하늘이 날카롭게 투명해서 눈이 부셨고 양 볼을 감싸는 겨울바람이 차가워 눈물이 찔끔 났다. 컵에 크리스마스 무늬가 찍힌 커피를 마시며 오랜만에 이어폰을 귀에 꽂고 거리를 걸었다. 틀림없이 슬픔만은 아닌 하지만 기쁨만도 아닌 교묘한 감정 속에서 오늘도 이 정도는 행복할 수 있구나, 나는 그대로이지만 매일이 조금씩 수리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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