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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Apr 02. 2019

사랑은 그의 등을 보며 마음이 내려앉는 것

 사랑하는 사람의 뒷모습이 담긴 이야기를 좋아한다. 나의 첫 번째 뒷모습은 이런 이야기였다. 너를 좋아했던 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던 너와 여름에 벤치에 앉아 이어폰을 나누어 꽂고 음악을 들었다. 그날 너는 담배를 피우고서 신발 끈을 묶으려 고개를 숙였다. 그 무덥고 끈적했던 여름날, 담배냄새와 열기, 달뜬 치기 같은 것들이 잔뜩 벤 네 등을 보며 나는 마음껏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랑은 그의 등을 보며 마음이 내려앉는 것이라고.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만다고.


 우리는 매일 까닭 없는 감정 속에서 살아간다.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에서 마고는 이렇게 말한다.  “가끔 길을 걸을 때 도로 위로 한 줄기 햇살이 떨어지면, 그럼 그냥 울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 순간은 금방 지나가고, 어른이니까 순간적인 감상에 빠져서 울면 안 된다고 마음먹어요. 내 생각에 토니도 가끔 그랬던 것 같아요. 왜 그렇게 되는지 영문도 모르고 누가 어떻게 해줄 수도 없는 그런 상태요. 살아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그런 상태.”  사랑에 빠지는 일은 그렇게 무방비한 순간에 일어난다. 네가 담배를 피우고 신발 끈을 묶으려 고개를 숙였을 때, 그 뒷모습을 꽉 끌어안고 싶어 졌을 때, 그렇게 네가 살아있음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지니게 된 결핍까지 모두 기꺼이 사랑하게 되고 말았을 때.  

 

 그래서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상대 안에서 결핍을 발견했을 때이다. 내가 상대의 결핍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착각과 함께 사랑은 시작된다. 더 나아가 상대 역시 나의 결핍을 사랑해 줄 유일한 존재라고 착각할 때 우리는 사랑 안에서 가장 완벽한 순간을 맞이한다. 그러나 착각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나는 너의 결핍을 절대로 채울 수 없으며 너 또한 절대로 나의 결핍을 채울 수 없음을 깨닫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착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된다. 그때부터 단 하나뿐이라고 믿었던 사랑 이야기는 끝을 향하기 시작한다. 어떻게든 발버둥 쳐보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사랑과 열기, 한계와 욕망, 기쁨과 슬픔, 기대와 실망, 질투와 선망 같은 것이 잔뜩 고여 있던 누군가의 뒷모습을 떠올린다. 이미 다 알아버린 지금에도 내 마음은 그의 등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내려앉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사랑에 빠질 것이다. 사랑은 알면서도 기꺼이 다시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 혹은 다시는 같은 착각에 빠지 않겠다 다짐해 놓고 그 결연했던 다짐이 무색하게 다시 단숨에 착각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


 오늘 아침 나는 발에 난 작은 상처의 껍질이 이제야 올바른 모양을 되찾은 것을 보았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니었는데 그리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 올바른 모양의 단단한 껍질을 한참 매만졌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집을 나서 출근하는 길 도로를 달리다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죽어 있는 고양이 곁을 무책임하게 지나쳤고, 도로 끝에서 쏟아지듯 핀 개나리꽃을 보았다.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지만 결국 누군가는 상처를 받게 되는 수많은 관계와 살아있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일들을 생각하면서. 땅에 새싹도 돋기 전에 나뭇가지에 홀로 먼저 피는 꽃. 하지만 그 샛노란 섣부름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단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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