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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Feb 22. 2019

조금 더 쓸모없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알겠어, 그는 대답했다. 세 글자로 일 년의 사분의 일간 쏟았던 애정이 끝났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코트를 여미며 겨울의 볕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겨울의 볕은 조금 더 따뜻한 구석이 있다.

 

 내 방 창문 밖으로는 사백 년 된 고목나무가 보인다. 올해 나는 고목나무의 사계절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던 고목나무의 길게 뻗은 나뭇가지 위에 싱그런 연둣빛의 나뭇잎이 돋고, 나뭇잎이 진초록으로 무성해지던 모습을. 무성한 잎이 꼭대기부터 서서히 빨갛게 물들던 모습을. 그러다 갑자기 나뭇잎이 낙엽이 되어 모조리 다 쏟아져 내리던 모습을.

 

 그런 일은 생각보다 더 쉽게 일어나는 것이었다.

 

 고목나무 옆에는 멋진 정원을 가진 단독주택이 있다. 이번 여름 정원에는 키가 작은 해바라기가 하나 자랐다. 그곳에는 늘 남겨져야만 하는 강아지가 한 마리 산다. 근사한 정원을 가꾸러 집주인이 정원으로 나오면 해바라기 옆 작은 집에 사는 강아지도 자신의 집 밖으로 나온다. 강아지는 묶여 있어서 그 근사한 정원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늘 집 외벽에 가려 보이지 않는 주인을 향해 왕왕, 왕왕하고 짖고는 했다. 주인은 정원을 가꾸는 동안 한 번도 강아지의 부름에 답한 적이 없다. 간혹 "조용히 해."라고 외칠뿐. 두 눈 아래에 흰 점이 있는 아주 까만 강아지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견딜 수 없어졌다. 저 작은 강아지는 왜 저렇게 끝끝내 짖는 것일까. 쓸모없게. 너무 쓸모없어서 마음이 아프게. 그만하면 알 때도 되었을 텐데. 그게 얼마나 쓸모없는 일인지를.

 

 알겠어라는 세 글자를 보며 나도 강아지처럼 무쓸모 하게 긴 시간을 짖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서글펐다. 나는 그에게 빌려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책 두 권을 떠올렸다. 좋은 구절마다 괄호를 치고 페이지 한 귀퉁이를 접어 놓은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책 두 권을. 제주도에 다녀와서 선물한 촌스럽고 귀여운 모양의 책갈피도 떠올렸다. 그런 것들을 보며 너는 한 번쯤 피식 웃거나 눈을 찡그릴까. 조금은 나를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할까. 삶과 애정과 관계가 그 정도라면 쓸모란 무엇일까. 확실한 것은 네가 웃으며 내 코를 살짝 깨물었을 때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따뜻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는 것. 그렇게 모든 일이 일어났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작은 강아지는 짖는 동안 가장 간절하고 행복했을지 모른다. 좋아하면 그런 법이니까. 그럴 땐 그렇게 쓸모없는 시간을 보내고 싶은 법이니까.

 

 얼마 전에 아이슬란드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보낸 엽서가 도착했다. 엽서의 사진은 멋진 얼음 조각이었다. 나는 엽서를 보자마자 우와! 하고 소리를 질렀다. 친구는 엽서에 이렇게 썼다. '그래서 내가 할 말은 아이슬란드 노잼. 아무도 왜 이 말은 안 하는 거지?? 그렇지만 와봤으니까 이런 말도 하는 거겠지?'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며 아주 크게 웃었다. 매일 조금씩 더 소용없는 것들에 부지런해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겨울의 정원에는 해바라기는커녕 작은 잎 하나 나지 않을 것이다. 두 눈 아래에 흰 점이 있는 아주 까만 강아지는 여전히 작은 집에서 잘 살고 있다. 하지만 이제 짖기를 포기하는 방법을 알아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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