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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Feb 22. 2019

도서관 정수기와 붕어빵

 작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나는 매일 남산도서관에 갔다. 나는 시험을 준비하는 중이었고 백수였다. 집에서 40분 거리에 두 번이나 버스를 갈아타야 갈 수 있는 남산도서관에 다닌 이유는 남산타워의 낮과 밤을 보면서 매일 서울을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나름대로 효과 있는 선택이었는데, 실제로 아침마다 도서관에 가는 길이 지옥 같지는 않았다. 남산은 계절의 변화를 눈치채기 좋은 곳이었고 나는 썩 괜찮은 기분으로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풍경을 마주했다. 도서관 앞에는 작은 공원과 등나무 벤치가 있었다. 등나무는 늘 기분을 쾌활하게 해 자주 그곳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저녁때는 초코우유를 하나 들고 도서관 건너 전망대로 가 서울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간이면 늘 석양이 졌다. 나는 전망대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매일 초코우유와 함께 서울을 내려다볼 수 있다니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과 별개로 도서관 열람실은 숨 막히는 곳이었다.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공도서관에서 나는 살면서 가장 많은 종류의 사람을 한꺼번에 보았다. 각종 자격증과 국가고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위해 치열하게 공부에 매달리는 10대, 20대, 30대, 40대, 열람실 번호표를 뽑아 든 채 엎드려서 코를 골며 잠만 자고 돌아가는 할아버지, 매일 밤 커다란 도화지를 들고 나타나 중얼거리며 그림을 그리는 할머니.

  

 비가 오는 날이었다. 나는 습한 냄새가 나는 열람실에서 잠시 나와 파란 플라스틱 컵에 정수기의 찬물을 받아 비가 오는 창밖을 내다보는 중년의 남자를 엿보았다. 남자는 일주일째 파란 플라스틱 컵을 들고 복도에 앉아 있었다. 눈을 감고, 물을 마시고, 다시 눈을 감고, 그러다 더러는 일어나서 창밖을 보기도 하고, 매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고작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찬물을 삼키는 일일까. 그러다 오늘은 비가 온다, 비가 오는 산의 모습은 이런 모습이구나 하며 알고 있음에도 놀란 척해 보는 일일까. 나는 남자의 닳은 구두 뒤꿈치와 느릿하고 힘없는 발걸음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실컷 후회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열람실은 치열했고 등나무는 활기찼으며 남산에는 좋은 계절이 찾아왔다. 나는 매일 달리는 사람을, 큰 소리로 웃는 사람을, 구내식당에서 가짜 남산 돈가스를 맛있게 먹는 사람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사실은 그러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다는 이 말을 나는 좋아한다. 결국 모든 삶은 매일 공공도서관에서 정수기의 찬 물을 들이켜는 하루로 귀결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겨울의 남산을 보지 못하고 도서관에 다니길 그만두었다. 겨울이 되면 좋아하는 사람과 붕어빵을 사 먹고 싶어 진다. 한 손은 같이 깍지를 끼고 남은 손으로 뜨거운 붕어빵을 들고서 호호 불어가며 추운 거리를 오래 걷고 싶다. 살아가는 것은 매해 겨울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붕어빵을 괜히 사 먹어 보는 일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이라서, 무슨 맛인지 뻔히 알면서도 붕어빵을 한 번 더 먹어보는 일. 역시나 별 볼일 없었지만 놀란 척해보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다음 겨울에 누군가의 손을 잡고서는 뜨거운 붕어빵을 사 먹자 말하는 일.   


 어김없이 겨울이다. 차갑고 날카로운 공기와 시리게 투명한 하늘과 헐벗은 나무는 안중에도 없이 한 해 중 온 세상이 가장 화려 해지는 계절, 그래서 까닭 없이 들뜨거나 가라앉는 계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겨울이 가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따뜻하게 "깍지를 끼고 같이 붕어빵을 사 먹자."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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