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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Apr 23. 2019

당구로 남는 시절

 외삼촌이 폐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나는 외삼촌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외삼촌은 남다르게 체격이 좋으셨다. 검고 넓은 얼굴에 몹시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으셨고 누군가는 외삼촌의 짙은 쌍꺼풀이 나를 닮았다고도 했다. 나는 엄마에게서 아주 가끔만 외삼촌의 소식을 들으며 매일 일을 했고 친구를 만났고 무료하거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무런 전조가 없었던 어느 날 저녁, 엄마는 낮게 갈라지는 목소리를 떨면서 "외삼촌이 위독하시다."라는 말을 수화기 너머로 건넸다. 외삼촌의 임종을 지키는 엄마가 있는 병원으로 가려는 내게 엄마는 '의식이 없으시니 오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라고 문자를 보냈다. 나는 발걸음을 돌려 샌드위치를 사 먹고 집에 와서 여느 날처럼 운동을 조금 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장면이 있다. 시청에 있는 외삼촌의 사무실에 갔을 때였다. 외삼촌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근사한 사업가이자 대단한 재력가였고 나는 외삼촌의 사무실에 갈 때면 어깨가 으쓱해지고는 했다. 외삼촌이 엄마와 나, 동생에게 멋진 저녁 식사를 약속한 날이었다. 차가 막혀 조금 늦은 우리에게 외삼촌은 기다리다 못해 배가 고파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고 말했다. 외삼촌의 책상 위에는 정말 지금 막 비워진 듯한 짜장면 그릇이 놓여 있었다. 눈이 동그래져 그럼 이제 저녁은 어떻게 드실 거냐고 묻는 나에게 외삼촌은 "짜장면은 간식이지."라며 검붉은 얼굴의 커다란 눈을 찡그리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날 나는 살면서 가장 맛있는 소고기를 먹었다.


 외삼촌은 삶의 마지막 시간을 모르핀으로 견뎠다고 한다. 모르핀의 강한 진통 효과 덕에 외삼촌은 큰 고통 없이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엄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깨어 있지 않은 외삼촌과 마주해야 했다. 친척들이 외삼촌을 보러 온 날이었다. 내내 잠들어 계시던 외삼촌이 잠시 깨어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을 마주하고 처음으로 한 말은 "당구!"였다. 외삼촌은 지금 당장 당구를 치러 가야 한다는 듯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당구!"라고 두어 번 외치셨다고 한다. 그리고는 다시 이내 잠드셨다.


 당구라니. 나는 위독한 외삼촌이 당구를 외치며 겨우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몇 번이고 상상했다. 외삼촌에게는 병원에 누워 있기 전 당구를 치러 다니던 시절이 그 순간 떠오른 가장 멋진 시절이었을까. 아픈 외삼촌을 보지 못해서인지 여전히 걸걸한 목소리로 호령하듯 당구를 외치는 외삼촌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내가 죽기 전에 내게 남을 순간을 생각했다. 그건 당구 같을 것이다. 당구처럼 경쾌한 소리가 나고 조금은 별 볼 일 없겠지. 개나리가 막 폈던 삼월의 길상사. 네가 마침내 내 이름을 불렀을 때 지었던 표정. 집에 돌아오는 길 담벼락에 세워진 화분들이 만들어내던 감정. 흐린 날 꽃에 물을 주던 사람의 뒷모습. 그 뒷모습을 보며 떠올렸던 많은 사람. 4월, 나무들이 온통 연둣빛을 틔우는 모습을 보며 심상하지만 초조하게 너를 기다렸던 시간. 그리고 그러한 일이 앞으로도 여전히 내 곁에 있기를.


 외삼촌은 당구를 얼마나 잘 치셨을까. 당구를 치는 외삼촌의 얼굴을 떠올렸다. 술을 많이 마신 탓에 검붉어진 얼굴로 늙은 외삼촌이 호탕하게 웃고 때로 손을 번쩍 드는 모습을. 삶에서 남는 일은 당구를 치러 나가는 길에 바람을 맞으며 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 또 당구를 치고 그날 친 당구의 유쾌함이나 뿌듯함을 호연하게 떠들어 보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나는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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