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을 진단받다
세계여행을 떠나기 전 확실하게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사실 나는 일을 하면서 정신의학과를 방문한 적이 있다. 정말 큰 용기를 내서 혼자 갔었다. 하지만 '너가 여기 왜 왔어?'라는 듯한 눈빛과 무심한 그 말투에 상처받아 다시 방문하지 않았다. 그냥 타왔던 약만 1주일 먹었다. 오랜 기간 내가 느껴온 의심스러운 나의 증상이 정말 치료가 필요한 상황인지 아닌지 알고 싶었다. 살기 싫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꽤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문득 드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인지 인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옥이라고 표현했던 일을 그만두고도 1시간 내내 오열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미친 건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뭐가 그리 서러웠는지 살면서 가장 오래 오열을 한 날이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 확실하게 나를 점검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문의의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마지막으로 용기 내어 다시 한번 정신의학과에 방문했다.
간단한 검사를 한 후 의사 선생님을 만나 뵈었다.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우울, 불안이 높은 상태라고 하셨다. 그래서 가장 알고 싶었던 것인 '약물복용을 해야 할 정도인지?'에 대한 상담을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듣고 싶은 말을 듣고 싶어서 병원에 갔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약물 복용 까지는 필요하지 않은 정상적인 범주에 들어가는 정도로 보입니다"라는 말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약 복용을 살짝 권하시는 듯했지만 나는 인정하기 싫었다. 상담 끝에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이었던 일을 그만둔 상태고 신체적인 이상 증상 까지는 없으니 우선 지켜보되 더 정확한 검사를 해보자고 결론이 났다. 30만 원대 하는 비싼 검사였지만 오랜 기간 나는 지쳐있었기에 흔쾌히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 제대로 객관적인 검사를 통해 듣고 싶었다.
엄청난 양의 숙제를 받아오고 2주 뒤 검사를 예약했다. 최대한 숙제를 솔직하게 작성하고 2주 뒤 검사를 했다. 검사는 2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성인 심리평가 보고서'라고 써져 있는 A4용지 5장 분량의 검사결과를 받았다. 의사 선생님께서 검사결과를 설명해 주셨다. 진단명은 '우울증'이다. 현재 일을 그만둔 상태라 우울증의 정도는 낮지만 오르락내리락한다고... 그렇다. 일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내 상황에 따라 우울증의 정도는 심해지기도 했다. 특히 검사를 하러 가기 전 허리를 심하게 삐끗하여 밥도 못 먹고 3-4일 내내 누워만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우울함이 몰려와 참 힘든 시간을 보냈다.
검사결과를 정리해 보자면-
1. 정서적으로 미성숙하여 감정 조절을 잘 못하기 때문에 욕설, 폭력적인 성향이 나올 수 있다.
: 특히 정서적으로 많이 가까운 사이에서 발생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하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제어할 수 없었다. 반성하고 있으며 다시는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이 또한 이곳에 기록을 한다.
2. 강박성 성격 장애가 있다. 그리고 도덕적인 가치관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굉장히 불편해한다고 한다. 그 이유 자체가 '불안감'이 매우 크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 생각해 보면 시간에 대한 강박도 있던 것 같다. 일을 할 때 나는 한 번도 지각을 한 적이 없다(아, 지하철 시위로 인해 늦은 적이 있구나...). 끼니를 거르더라도 지각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각을 하는 사람들 또한 불편했다. 길가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 무단횡단을 하는 것 등 나는 보는 것 자체도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다. 선생님께서 쉽게 말하면 "융통성이 떨어지는 사람이다"라고 말하셨다. 맞는 말이다. 나는 융통성이 부족하다. 고백하자면 이런 내가 너무 싫고 짜증 나서 혼자 길거리에서 맥주 한 캔을 마시고 길에 버린 적이 있다. 그 당시를 생각하니 아직도 마음이 좀 불편해진다.
3. 완벽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쓴다.
: 완벽주의적 성향이 강해서 나 자신을 너무 혹사시키거나 혼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사실 브런치 첫 글을 발행하려고 할 때 고민을 많이 했다. 나름 그래도 작가라는 호칭을 부여받고 첫 글을 올려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수정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하자 그런 나 자신이 싫어서 '에라 모르겠다 그냥 하자!'라고 하며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발행했다. 뭔가 속이 후련한 느낌을 받았다. 그 글이 내 첫 발행 글인 '나의 버킷리스트'이다.
: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은 참 바뀌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가장 첫 번째로는 내 마음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것 같다.
그래 꼭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하는 거지 뭐
Just do it
4. 자살 위험성이 높다.
: 자살 위험도에 관련된 지표가 있었는데 자살 위험성이 높다고 하셨다. 이 결과에 깜짝 놀라 얼마나 높은지 여쭤봤더니 상중하 중 '상'이라고 하셨다.
딱히 살아야 할 이유를 못 느끼고 있는 상태라 하셨다. 사실 맞는 말이다. 우울증이 심해질수록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바에는 그냥 죽어서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하지만 내가 죽지 못한 단 하나의 이유 '세계여행'이 고통스러운 지옥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실제로 세계여행이 끝나고 나서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5. 약물 복용이 필요하다.
: 가장 궁금했던 약복용이 필요한 상황인지에 대한 결과는 '약 복용이 필요하다'라는 결론이 나왔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으나 검사를 하고 결과를 들으니 인정하게 되었다. 인정하기 정말 싫었는데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처음으로 내 자신을 돌봐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우울증 약 복용을 시작하면서 정신과 의사 선생님을 많이 만나 뵈지는 못했다. 우울증을 진단받았다 하더라도 나는 떠나야만 했다.
마지막 진료를 보러 간 날이다. 유난히 병원 안에는 대기 중인 환자들이 매우 많았다. 대기 시간은 기본 1시간이 훌쩍 넘었다.
드디어 선생님을 만나 뵙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뒤 나는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제가 1년 좀 넘게 해외에 나가려고 합니다. 약 복용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의사 선생님은 눈이 커지시면서 당황해하셨다. 선생님의 계획은 이번 약은 동일하게 하고 다음부터는 증량을 할 계획이었다고 하셨다.
(아직도 왜 증량을 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다음에 방문하면 여쭤봐야겠다)
판단이 매우 빠르신 선생님은 곧바로 최대한 처방해 드릴 수 있는 양을 처방해 드릴 테니 꾸준히 복용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같은 성분의 약을 그 나라에서 처방받아 복용하라고 하셨다.
"혹시나 너무 힘든 날에는 2알 복용하셔도 됩니다"
이 말이 지금까지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꾸준히 진료를 볼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여행 중 정신적으로 힘들 때 도움이 되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잘 다녀오세요"라고 인사를 해주셨다.
"네 감사합니다. 1년 뒤 뵈러 올게요!"라고 말하며 진료실을 나왔다.
선생님은 미소로 답해주셨다.
그 이별의 순간이 참... 묘했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니 우울증 치료를 받던 환자가 자살하는 경우도 겪으셨겠지? 나에게 어떤 마음으로 인사를 하셨을까? 감성적인 나였다면 울음을 꾹 참고 인사를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선생님은 엄청나게 이성적이시고 가끔 환자에게 팩트폭력을 하시는 분이라 그냥 약 꾸준히 먹고 오기를 바라는 마음만 있었을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알약 90개를 배낭에 챙겨 세계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살고 싶은 이유를 찾아내고 그것을 기록하여 평생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