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레디레
언젠가는 한 번쯤 머리를 밀어보고 싶은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지내며 머리를 미는 것은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세계여행을 시작하면서 여행 중 머리를 밀어보고 싶었고 자연스럽게 '인도'에서 머리를 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는 이상하게 머리를 밀 용기가 샘솟는 나라다. 참 매력적인 이 나라... 인도 리시케시 타포반에 도착한 날 숙소를 구하기 위해 걸어 다니다 우연히 지나친 미용실에서 머리를 밀기로 했다. 미용실이라고 하는 게 맞는지 살짝 망설였다. 1평 정도 되는 공간일까? 오직 딱 한 명의 손님을 위한 자리가 있다.
내 차례가 되어 의자에 앉았다. 거침없이 내 머리를 잘라내기 시작하셨다. 환경은 열악했으나 미용사 선생님의 가위질 소리만큼은 서울 미용실 못지않았다. 처음에는 너무 짧게 다 미는 것이 두려워서 일단 너무 짧지 않게 잘라달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다 자른 후의 내 모습을 보고 고민 없이 그냥 다 밀어달라고 말씀드렸다. 처음으로 바리깡이 모든 내 머리 두피를 스쳐 지나가는 느낌을 느껴보게 되었다. 머리가 밀리는 동안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차마 내 모습을 볼 용기가 안 났다. 한국인의 빨리빨리를 패치하고 계시는 듯한 미용사분에 의해 내 머리는 순식간에 밀려나갔다. 마지막 바리깡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가고 3초 뒤 내 모습을 거울로 바라보았다. "어랏? 생각보다는 그래도 괜찮은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밋밋한 느낌이 들어해보고 싶었던 스크래치를 부탁드렸다. 단번에 오케이라고 하시며 프로페셔널한 모습으로 내 우측 옆머리에 스크래치 두 개를 넣어주셨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나는 왼쪽에 스크래치를 넣고 싶었지만 빨리빨리 미용사분이 내 우측에 있었기 때문에 우측에 하게 되었다. 우리는 미리 두 명 머리를 미는데 100루피를 말씀드렸고 미용사분은 일단 앉으라며 대답을 피하셨다. 그때부터 아, 우리는 100루피에 머리를 밀 수 없겠구나 하고 예상했다. 예상은 역시나 맞았다. 300루피를 달라고 하셔서 약간의 흥정으로 240루피를 지불했다. 한 명당 약 2천 원 꼴에 머리를 민 셈이다.
리시케시 미용사 선생님의 빨리빨리를 경험하다 보니 7년 전 인도 어딘가에서 내 머리를 잘라주셨던 인도분이 생각났다. 이분에게서 배운 힌디어가 아직도 기억에 난다. 머리를 자르고 숙소로 향하던 중 작은 가방을 미용실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부리나케 서둘러서 미용실로 갔고 다행히 가방은 그대로 있었다. 약속이 있어 허둥지둥 챙겨 나가는데 미용사선생님이 진지하지만 살짝 미소 띤 표정으로 '디레디레'라고 말해주셨다. '디레 디레'는 '천천히 천천히'라는 뜻이다. 한동안 내 프사명으로 해놨었다. 나름 급박했었던 그 상황과 아주 짧은 선생님의 그 말씀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다시 인도에 와서 미용실에 가보니 더욱 그리워지는 분이다. 그때의 내가 지금처럼 이렇게 블로그에 여행기록을 열심히 남겼더라면 다시 찾아뵐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머리를 밀었든 안 밀었든 인도에서 받는 시선은 변함이 없다. 그 덕분에 머리를 밀었을 때 단점은 없다. 나에게 유일한 단점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이었기 때문에... 머리를 밀고 나서 장점만 있다. 우선 너무 편하다. 머리를 감고 말리는데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 특히 드라이기를 들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일이 없다. 선글라스를 쓸 때도 머리카락을 신경 쓰지 않고 쓸 수 있다. 모자를 쓸 때 앞머리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선크림을 바를 때도 너무 편하다.
그리고 물리적인 편리함 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편해졌다. 소위 말하는 속세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남을 느꼈다. 20-30대 한국 여성이라면 외모에 스트레스를 안 받아 본 사람이 드물지 않을까? 피부에 신경 쓰고 정기적으로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관리하고 다이어트를 하고 이것저것 정말 돈도 시간도 많이 들어간다. 필요 이상의 과한 외모스트레스가 발생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외모에 대한 말을 쉽게 서로에게 말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상처를 받은 기억이 있다.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말은 코에 블랙헤드 관리 좀 해라, 왜 옷을 항상 똑같은 것을 입냐, 옷이 그거밖에 없냐, 왜 머리를 짧게 하고 다니냐 등... 악의 없이 가볍게 말한 것이라 할지라도 상대의 외적인 것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무례한 언행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함부로 그러한 말을 한 적이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고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반대로 너무 과한 칭찬 또한 좋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외모에 대한 칭찬을 너무 받으면 자연스럽게 외모가 바뀌었을 때 더 큰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다. 또한 외적인 것에 대해 잘못된 가치관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외적인 것에 대한 것은 딱이 언급을 크게 하지 않는 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냥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는 것이니까.
'외적인 것에 대한 언급'에 대하여 더 나아가면 '인종차별' 또한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현재까지 세계여행을 하는 중 심각한 인종차별을 겪은 적은 없다. 혹시나 언젠가 여행을 하다 인종차별을 겪게 된다면 어떻게 대처를 하면 좋을까? 고프로가 손에 있다면 찍을까? 잘못된 것이라고 알려줄까? 아마도 나는 그냥 아무 말 못 하고 지나간 후 씩씩거리며 와노보노에게 투덜투덜거릴 것 같다. 하지만 그 상대가 너무 과하다 싶으면 나도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다.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야기가 어쩌다 인종차별까지 왔을까? 아무튼 머리를 밀고 나서 나는 편해졌다. 사는게 조금 더 편해진 느낌이다. 당분간은 짧은 머리를 유지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