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 마지막 이야기
내 눈썹도, 내 손끝도, 내 발가락도..
너를 따라 움직여
(마지막 이야기)
우리는 한참을 내방 창가에 나란히 기대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창밖에는 이렇다 할 풍경이 없었지만,
그 좁은 창가에 둘이 딱 붙어 서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저 멀리 에게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쌀쌀한 밤공기에 손과 볼이 차가워질 만 한데,
홀짝홀짝 마시다 빈 깡통이 된 에페스 맥주 덕인지 우리의 두 볼은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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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로 J의 이야기를 들었다.
J는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이별의 아픔으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벗어나려 여러 가지를 시도해봤지만,
오히려 점점 더 빈자리만 크게 느껴질 뿐이었다.
결국 온전한 ‘나’를 찾기 위해 무작정 혼자 여행을 떠났지만,
외로울수록 그 사람이 더 생각나서 괴로웠다.
먼저 헤어지자고 말한 쪽은 J였다.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
관계에 대한 아쉬움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털어 내기에는 아직 이른 시점이었다.
이성은 감정을 가까스로 설득했지만,
치유는 오롯이 감정이 감당해야 할 숙제이며,
시간을 흘려보내며 하루하루 눈을 떴을 때
더 나아져 있기를 기대하며 기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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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연애에서,
여자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는 건 꼭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다해버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못되고 바뀌지 않는 행동들을 고치겠다고,
미안하고 사랑하니 돌아와 달라고 말해주길 바라는 마음일지 모른다.
물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투정인 양 무책임하게 내뱉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 행동들이 고쳐지지 않으면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는 인연인 것이고,
노력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면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더라도 그만하는 게 맞다는 이성적 판단에 의한 것이다.
결국, 처음과 같이 계속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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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야기를 마치고는 홀가분한 듯 미소를 지으며
밖을 바라보는 J의 옆모습을 보며
'안아주고 싶다' 생각이 들었고
달달한 술기운이 용기를 보탰다.
가만히 고개를 돌려 J의 볼에 입을 맞췄다.
J는 깜짝 놀라 찡그린 듯 웃으며 나를 밀쳤다.
그 팔을 잡고 다시 한번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이고~ 내가 이 방에 오는 게 아니었다.
맥주도 다 마셨고 나는 이제 내려가 잘란다~'
우리는 조금 더 대화를 나누다 헤어졌다.
다음날 우리는 에게해를 보러 갔다.
아직 따뜻한 햇볕과 시원한 가을바람을 느끼며
바닷가를 둘러싼 옛 성곽 위에 올랐다.
성벽 위에 J의 무릎을 베고 누워 책을 읽어줬다.
별 것도 아닌 글귀에 까르르 웃다가도
생각이 깊어지는 문장에 한참 동안 서로의 생각을 나누기도 했다.
오후엔 시내로 나가 손을 꼭 잡고 아이쇼핑을 하고
스타벅스에 앉아 달달한 커피와 함께 한참을 웃으며 수다를 떨었다.
기다란 벤치에 정수리를 맞대고 누워 있을 때엔
지나가던 포근한 인상의 할아버지가 우리의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멋지게 모델이 되어줬다.
서로는 이 규정되지 않은 사이에 대해 묻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어떤 형태로든 정리되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자칫 섣부른 조바심에 이 즐거운 순간이 방해를 받을까 두려웠다.
다음날 우리는 마지막 일정을 맞이했다.
나는 야간 버스를 이용해
이스탄불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가야 했고,
J는 하루 더 머물고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 체크아웃을 하고 내 짐을 모두 J의 방에 옮겨 놨다.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는 '시린제마을'이었다.
시린제 마을은,
셀축에서 버스로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 과일 와인을 제조하는 가게들이 언덕 마을의 골목골목 숨어있어,
다양한 와인들을 시음하고 직접 살 수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수줍게 웃기만 하시는 할머니는 구입을 재촉하지 않았고,
몇 잔을 시음하든 웃으며 다음 잔을 권했다.
한 가게에 눌러앉아 취기가 오면 돌아다니다
또 다른 가게에 들러 취기를 올린다.
시골스러운 풍경과 소박한 사람들,
정이 넘치는 작은 언덕 마을이었다.
시린제 마을에서의 즐거운 낮시간을 보낸 후
양손 가득 값싼 선물용 와인을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야간 버스를 타고 이스탄불로 돌아가야 하는 나를 위해 조금 일찍 저녁 식사를 하러 한적한 식당엘 들렀다.
터키 전통주 라키(RAKI)를 주문했다.
라키는 물을 타서 마시는 술인데,
투명한 라키에 물을 부으면 뿌옇게 변한다.
얼음을 타서 마시기도 하는데, 매우 독주이다.
마지막 식사를 앞두고 아쉬운 얼굴을 가득한 채
빨간 식탁보가 씌워진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우리는 아직 서로의 연락처 조차 알지 못했다.
J는 경상도의 어느 도시에, 나는 서울에 살고 있었고
무시할 수 없는 물리적 거리 또한 서로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으로 내내 서 있었을 것이다.
여행지에서 생기는 순간의 감정일지 모른다는 걱정도 서로의 속내에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런 사실들이 내내 마음 한구석을 누르고 있었다.
뭔가 말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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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가 끝나갈 무렵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이제 곧 헤어지면 다시 만날 방법이 없어.
사실 나도 모르겠어.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리고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절대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는 걸, 말로 밖에는 증명할 방법도 없고.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지금 네가 좋고,
돌아가면 많이 보고 싶을 거야.
한국에서 다시 봤으면 좋겠어.
넌 어때...?'
J는 말을 아꼈다.
고민하고 있었고 나는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J의 연락처를 원했지만
J도 그걸 원할 때 받고 싶었다.
'그래 일단 그만 이야기하자. 버스 시간 늦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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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꺼내러 J의 방으로 들어왔다.
터미널이 바로 앞 건물이긴 했지만 이제 30분 남짓한 시간만이 남아 있었다.
불안했다.
이대로 헤어지면 영영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가벼운 하룻밤 일탈을 원했다면 J의 태도가 달랐을까?
이별의 아픔으로 마음고생한 스스로에게 주는 보상 같은 거?
에단 호크와 쥴리 델피가 심어 준 로망에 대한 실현 같은 거?
J를 떠난, 아니 그렇게 쉽게 놓친 그에 대한 복수 같은 거?
하지만 J도 알고 있었다.
나의 마음은 벌써 그 경계를 넘어 버렸고,
난 최소한의 미래라도 약속하는 사이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오히려 선택이 어려워졌을 것이다.
아직 마음속엔 정리되지 않은 사람이 남아 있고
지금 당장 견디기 힘든 아픔을 피하기 위해 너무 경솔한 행동은 아닐지,
진지하게 고민할수록 막상 이 사람에 대해 아는 것조차 별로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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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복잡한 생각들로 배낭끈을 조이다
침대에 걸쳐 앉아 있는 J를 돌아봤다.
J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딘지 불편한 모양새로 나를 보고 있었다.
분명 아쉬워하고 있었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 일시적인 건지는 중요치 않았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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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에게 다가가 힘차게 끌어안았다.
우리는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려 온 사람들처럼
급하게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더 나아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함에
더욱 간절한 느낌이었다.
서로의 손과 다리가 숨 가쁘게 엉켜갔고,
입술에 느껴지는 하나하나의 굴곡과 살결을 기억하고 싶었다.
나는 바쁘게 내 입술과 손끝에 J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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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숨을 고르고 시계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J의 볼 위에 내 볼을 얹은 채 귓가에 물었다.
'우리... 정말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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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터미널에는 간신히 도착을 했고,
버스는 당장이라도 떠날 듯 웅웅대며 재촉하고 있었다.
길게 쳐다보면 눈물이 맺힐 것 같았다.
짧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인사말도 없었다.
나중에 보자, 연락할게, 한국 도착하면 전화해...
아무 말도 쓸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조심히 있다 돌아와- 나 갈게...'
나는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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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계단쯤 올랐을 때
J가 나를 불렀다.
가슴이 요동쳤다.
순간 수많은 생각이 스치며 뒤를 돌아보는 내 손에
작은 쪽지 하나가 건네 졌다.
'조심히 가고,,, 연락해라....'
J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