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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노란 과일

by 정가을

2008년, 평생 잊을 수 없는 이름,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며 승승장구하던 내 인생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나는 늦은 밤까지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또 독서실로 향해 새벽까지 공부하며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다. 4학년 1학기엔 휴학을 하고 미국 어학연수까지 다녀왔으니, 대학 졸업 후엔 당연히 원하는 회사에 입사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안정적인 20대 후반을 보낼 줄 알았다. 하지만 미국 금융위기가 닥치며 우리나라 취업 시장도 꽁꽁 얼어붙었고, 나는 아주 긴 취업 준비 기간을 보내게 되었다. 지금이야 많은 대학 졸업생이 취업 준비 기간을 갖고, ‘취준생’이라는 말도 흔히 쓰지만, 그때만 해도 4년제 대학을 나오면 대부분 바로 취업하는 분위기였다. 이렇게 나만 백수로 집에 있는 상황이 그저 인생 낙오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전까지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내 인생의 첫 ‘실패’였다. 나는 그야말로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게 무서웠다. 아침에 일어나 어디 갈 곳도 없고, 아무 할 일도 없는 게 너무 끔찍했다. 내가 더 이상 학교에 소속된 학생이 아니고,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게 낯설었다. 이력서를 넣었던 곳에서 족족 거절의 연락을 받았다. 불합격 메일엔 하나같이 내가 ‘우수한 인재’라고 했다. 뛰어난 역량과 잠재력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뽑지 않았다. 차라리 말이나 하지 말지, 나는 기만당하는 느낌까지 들며 점점 자신감이 떨어졌다.


그렇게 긴 시간을 보내고, 한 회사에서 잠시 인턴십을 하게 되었다. 회사는 강남역에 있었다. 매일 서울의 중심으로 출퇴근하며, 멋지게 차려입은 직장인들과 마주칠 때마다 나는 더 주눅이 들었다. 그들이 목에 걸고 있는 사원증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엔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의 취준생이 있었고, 우린 아주 단순한 업무를 맡았다. 말이 인턴십이지 알바나 다름없는 최저 시급이나 다름없는 적은 월급을 받았다. 나는 매일 점심을 지하철역 계단에서 파는 김밥이나 샌드위치로 때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 내 옆자리의 여직원이 주먹보다 더 큰, 오렌지같이 생긴 노란색 과일을 가져와 점심으로 먹었다. 그 후 며칠 동안 그 여직원은 같은 과일을 가져왔다. 그녀가 과일 껍질을 벗길 때마다 아주 상큼하고 달콤한 향이 내 자리까지 퍼지며 내 입맛을 자극했다. 지금이었다면 과일 이름을 물었을 테지만, 당시 자존감이 바닥이었던 나는 묻지도 못하고 그저 과일의 정체가 너무 궁금했다.


그러고는 집에 와서 엄마에게 얘기했다. 크고 노란 과일이 너무 맛있어 보이는데,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고, 나도 한 번 먹어 보고 싶다고 말이다. 그날부터 엄마는 매일 퇴근길에 크고 노란 과일을 사 오셨다. 하지만 엄마도 그 과일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하루는 메로 골드 자몽, 다음 날은 황금향, 그다음 날은 천혜향을 사 오시며, “그 직원이 먹던 게 이게 맞니?” 하고 물으셨다. 나는 조금 놀랐고, 많이 감동했다. 그때의 나는 내가 너무 별 볼 일 없고, 그저 못난 자식 같았다. 너무 초라하고 작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이런 나를 위해, 그 과일을 먹고 싶다는 나의 한마디에, 매일 다른 종류의 노란색 과일을 사 오신 엄마의 사랑은 내 자존감을 다시 채워주었다. 지금도 과일의 이름은 모른다. 하지만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는 분명히 안다. 그 노란 과일보다 더 크고 달콤한 엄마의 사랑을 먹고, 나는 다시 괜찮은 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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