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루 밀러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친구에게 책을 추천할 때, 많은 부분을 고민한다. 이 친구의 성향이 어떻고,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곰곰이 생각한 후에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줘야 한다. 즉, 친구에게 추천할 만한 책을 선택하는 과정 속에서 많은 노력이 들어간다. 2월 중순에 대학교 친구를 만나, 서로에게 추천하는 책을 바꿔 읽기로 했다. 그때, 친구가 빌려준 책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다.
군대에서 <인간 실격>을 읽은 직후부터 책에 관심이 많아졌다. 한 사람이 쓴 글이 스스로 사유하게 만들고, 결국에 내 가치관을 무너트리고 다시 쌓게 만든 과정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단 한 권의 책이 가치관의 해제와 재조립을 가능케 하는데, 책을 안 읽을 이유가 있을까? 그렇기에, 문학 작품 중에서도 사유를 많이 하게 만드는 책을 선호한다. 그리고,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나를 사유하게 만든 책이다. 책을 읽는 동안에 철학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끝없이 던질 수 있었다.
제목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Why Fish Don't Exist)
저자 : 룰루 밀러
출판사 : 곰 출판
특정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부터 분류해 지칭하는 수단으로써 "이름"을 사용한다. 또한,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같은 관점으로 대상을 분류하기 위해, 같은 이름을 사용하기로 사회적 합의를 맺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에서 매우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 나라는 사람을 분류해 칭하기 위해선, "이명성"이란 이름을 사용한다.
이러한 관점을 가장 잘 대변하는 말이 "이름이 부여되고 그 대상은 실존한다."라는 니체의 말이다. 즉, 이름이 부여되어야 그 대상은 실존할 수 있다. 만약 이름이 없다면, 사회 구성원은 이름이 없는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부터 분류해 지칭하지 못한다. "이명성"이란 이름이 없다면, 나는 그저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사람 A로 존재할 뿐이다.
이름이란 수단이 동작하기 위해선, 사회적 합의가 필수 불가결하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특정 대상에 대해 같은 이름을 사용해야, 사회 집단 안에서 그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부터 분류해 지칭할 수 있다. 나라는 사람을 누군가는 "이명성"이라고 칭하는 반면, 또 다른 누군가는 "이진성"이라고 부른다면 어떻게 될까? 나라는 동일한 대상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분류하게 되는 셈이다. 결국, 원활한 분류가 일어나지 않아 나라는 존재를 제대로 지칭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름은 하나의 사회적 약속이다.
이름은 특정 사회 안에서의 약속이다. 바꿔 말해, 서로 다른 사회에서는 같은 대상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칭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에서 "사과"라고 부르는 것을 미국에선 "Apple"이라 부른다. 한국어를 모르는 미국인에게 무작정 "사과"라는 말을 외치면, 그 사람은 그 대상이 무엇을 뜻하지는지 모른다. 사과 사진을 보여주고, "사과"라고 말을 외쳐야 그제야 자신의 집단에서 칭하는 "Apple"이 대한민국이란 집단에서는 "사과"라고 칭함을 이해할 수 있다.
대상의 이름은 대상의 특징에 기반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는 라틴어에, 한국에서는 한자어에 기반해 이름을 칭하곤 한다. 예시로 "order"라는 단어는 라틴어인 Ordinem에서 기원한다. Ordinem은 배틀에서 단정하게 줄지어 선 실의 가닥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데, 이 모습에서 기반해 order은 정리하다, 정돈하다의 뜻을 갖는다. "주권"이란 단어는 한자어인 (1) 주인 주와 (2) 권세 권이 합쳐진 말로, 주인의 권리를 의미한다. 물론, 항상 이런 건 아니다. 즉, 우리는 대상에게 이름을 부여할 때, 그 대상의 본질을 잘 담기 위해 고찰하는 과정을 먼저 겪는다.
하지만, 만약 그 이름이 대상의 본질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사람이 대상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며 정의한 이름이 알고 보니, 대상의 본질을 대변하지 못한다면?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이 책을 핵심 키워드는 "어류"에 있다.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를 우리 모두는 "어류"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언뜻 보면, 모든 물고기는 비슷해 보인다. 온몸에 비늘이 있고, 아가미가 있으며, 바다에서 서식하기 때문이다. 이들 모두를 어류라고 칭하는 건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이는 피상적 영역에 한정될 뿐이며, 생물학적 관점으로 깊게 들어가 보면 어류라는 이름은 잘못된 이름이다. 폐어나 실러캔스라는 물고기는 상어, 장어보다 인간과 같은 포유류에 더 가깝다. 즉, "어류"라는 이름은 잘못된 이름이다.
이 책에서는 "어류"라는 이름을 버리지 못하고, 끝없이 매달리는 한 과학자가 등장한다. 그 과학자는 "어류"라는 이름 아래에 모든 물고기를 정의하려고 노력한다. 어류라는 호칭 자체가 잘못됐다는 과학적 근거가 등장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기는커녕 더 맹목적으로 추구한다. 이 믿음은 과학적 믿음이 아닌, 자신의 신념에 기반하기에 그의 집착은 갈수록 심해진다.
대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이름은 반증 가능성이 존재해야 한다. 대상의 이름이 본질을 담아내고 못할 수도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대상의 실제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현재의 이름에 매몰된다면, 그 대상의 숨겨진 가능성이 맹목적인 믿음에 가려질 수 있다. 물론, 이름 자체를 의심하고 거부하라는 말은 아니다. 애초에 이름은 사회적 약속으로서, 이를 부정하는 것은 사회의 안정을 저해할 수 있다. 다만, 이름이 본질을 담아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어느 정도 갖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인간은 자기 확신이란 성향을 지닌다. 그렇기에, 이 확신이 맹목적으로 가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일단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더 이상 그걸 제대로 바라보지 않게 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