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이런 걸 알았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목차
1. 세상은 불공평하다
2. 대학은 9회말 2아웃
3. '나'는 누구인가?
4. 모든 걸 테스트해보자
5. 전문성은 없다
6. 이상이 아닌, 현실을 보자
7. 남들에게 '나'를 보여주기
8. 우울한 감정은 옳다
27살, 드디어 대학교를 졸업했다. 회사와 학교를 병행하다 보니, 뒤늦게 졸업을 했다. 나는 대학생과 직장인, 그 사이 애매한 위치에서 성장을 해왔다. 그렇기에 "대학생 때, 이런 걸 알았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부분들이 있다. 지난 대학 7년을 회고할 겸, 블로그에 끄적여 본다. 모든 의견은 지극히 주관적입니다.
개인이 성장하기 위해선 능력과 의지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환경이다. 물론 환경이 없다고, 성장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가능성은 크게 제한된다. 능력과 의지가 아무리 있어도, 환경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한계를 맞이한다. 반대로, 능력과 의지가 없어도 환경이 있다면, 최소한의 성장은 이룩할 수 있다. 즉, 환경은 성장을 위한 최소한의 제약과 같다.
학생의 성장 환경은 스스로 바꿀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우리의 성장 환경은 순전히 '운'에 좌지우 된다. 마침(?) 태어나보니 부모님이 서울에 계셨다면, 자신의 성장 환경은 서울이 된다. 부모님이 해외에 계셨다면, 성장 환경은 해외가 되고, 시골에 계셨다면, 성장 환경도 시골이 된다. 시골, 서울, 해외 각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건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데, 애초에 인프라나 시스템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각자의 성장 환경은 부모님에 의해서 결정될 뿐,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물론 예외 케이스도 존재하지만, 비율로 보면 매우 적은 편이다.
나는 경기도 여주의 시골 고등학교 출신이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사람이 성장하는데 환경보다 의지와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고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눈 순간, 애초에 경험 가능한 영역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 도시에서 당연히 경험할 수 있는 건 시골에서 경험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리고, 이 경험 가능성의 차이는 성장에 차이를 만든다.
물론, 앞선 이야기는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당한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각자의 환경은 불평등했을지라도, 대학생 동안은 공평함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 시골 촌동네 고등학교를 나온 이명성과, 해외 고등학교를 나온 A군은 같은 강의를 수강하고,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같은 대외 활동을 할 수 있다. 즉, 경험의 기회가 어느 정도 공평하게 제공된다. 여기서, "어느 정도"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개인의 경제적 형편이 아직 존재하기 때문이다. 등록금을 위해 직접 알바, 과외 등을 하는 사람은 그만큼 새로운 경험에 쏟을 수 있는 리소스가 부족하다.
대학생 동안, 모두에게 공평하게 제공되는 기회를 어떻게 붙잡을지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린 시절부터 성장 환경의 차이에 의한 격차를 메꾸기 어려워진다. 마치, 성장을 위한 9회말 2아웃 같은 상황이랄까? 성장은 복리와 같이, 시간이 지날수록 증가 폭은 어마무시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좋은 성장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빠르게 성장 가속도가 붙는다. 높아진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유일한 시기는 대학생일 때가 아닐까 싶다.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은 '시간'이다. 대학생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므로, 이 시간을 얼마나 밀도 있게 쓰느냐가 핵심이다. 이때, 시간의 밀도를 정하는 건 온전히 개인의 몫이다. 이번 학기에 누군가는 학점을 넉넉히 챙겨주는 강의로 시간표를 채울 수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진로와 관련된 강의로 시간표를 채울 수 있다. 방학에 누군가는 휴식을 취할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방학 인턴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공평한 시간에서 무엇을 할지는 온전히 '나'가 결정하며, 이 결정에 의해 앞으로의 성장이 결정된다.
그렇다면, 어떤 선택이 가장 옳은 선택일까? '나'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AI 스타트업'이란 강의가 있다고 해보자. 이 강의는 스타트업을 희망하는 사람에게 유효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가치는 주관적이기에, 선택의 가치도 '나'와 '너'가 서로 다르다. 애초에 절대적인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계속 생각해서 '옳은 선택'을 정의해야 한다.
필자는 화학 공학을 전공하고 있었고, 저학년 시절에는 교수가 꿈이었다. 하지만, 10년 후에 어떤 일을 하고 싶을지 매번 생각했고 화학 공학자가 아니라, 스타트업 PM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부터 수강 과목도 필수 전공 외에 창업, 기획과 디자인 강의를 찾아들었고, 늦었지만 많은 성장을 이뤄냈다. 만약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에게 무의미한 유체역학, 물질 전달론 같은 강의에 열중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정의하는 여정은 끝이 없이 계속돼야 한다. 오늘 정의한 "나"가 내일의 "나"와 같을 수 없다. 매일 다양한 걸 경험하며, 개인의 생각과 가치관은 변한다. 그러므로, 매 학기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원하는 건 뭔가?"와 같은 메타인지를 계속 갖고자 한다면, 더 올바른 선택을 계속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필자는 작년부터 정기적으로 다 함께 진행하는 회고 프로젝트를 해왔다. 이처럼, 다른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큰 도움이 됐었다.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르다. 각자 잘하는 게 다르고, 좋아하는 것도 다르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모든 학생은 비슷한 교과 과정을 거친다. 그렇기에 자신은 누구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나중에 어떤 것을 하고 싶은지 고등학생 때는 알기 어렵다. '나'라는 존재의 정의는 경험을 통해 알아갈 수 있다. 마치 개발을 하기 전까지, 자신이 개발을 좋아하는지 어려운 것처럼? 하지만 한국의 모든 고등학생은 대학 입시에 집중해서 경험을 쌓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된 직후에는 모든 경험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수강 신청을 할 때, 디자인 강의를 들어볼 수 있고 혹은, 개발 강의를 들어볼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선택으로 각자가 경험하는 것도 달라지며, 이 경험을 통해 '나'의 정의도 달라진다.
대학생의 가장 큰 메리트는 자신이 내린 선택이 지금 당장의 인생을 흔들 정도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공대생이 기획에 관심이 있어서 서비스 디자인 강의를 들었다고 해보자. 이 강의를 수강한 게, 공대생의 인생을 바로 위험하게 만들까? 전혀 아니다. 이번 학기에 들은 강의가 자신의 인생을 무너트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대학생 시절에는 부담 없이 다양한 걸 시도해볼 수 있다.
필자는 공대생이지만 다양한 아이디어톤과 창업 대회를 나갔다. 이런 테스트적 경험이 쌓여가면서, '나'라는 존재는 스타트업에 관심이 있고, 엔지니어보다 PM이란 직무를 더 재밌게 할 수 있단 확신이 들었다. 인간은 경험하지 못한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렇기에 대학생 시절에 최대한 다양하고 많은 걸 경험해야, 더 많은 부분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대학생의 시간 동안, 자신이 특정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겠다는 환상은 버리는 게 좋다. 전문성을 기를 수 있는 곳은 회사지, 대학교가 아니다. 대학교에서 강의를 통해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론에 국한된다. 대학교에서 과제나 프로젝트로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다고 해도, 평가 잣대는 여유롭다. 좋지 못한 서비스를 기획했을 때, 회사에선 빠꾸 먹을 수 있다. 반면, 대학교는 학점을 낮게 받을 뿐이다. 혹은,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보다 상대적으로 덜 못했다면 높은 학점을 받을 수 있다.
취업을 봐보자. 취업 담당자는 대학생의 전문성을 높이 살까? 대학교에서 프로젝트를 리드했다고 해도, 수익이 나지 않으면 파산하는 회사의 프로젝트와 동일하게 평가할까? 대학생은 주니어고, 주니어를 뽑을 때의 기준은 전문성이 아니라 성장 가능성이다. 물론 예외적인 괴물 케이스가 있긴 하지만... 그렇기에 대학생이라면 전문성이 아닌, 다양성을 기르는 게 훨씬 좋다. 오히려 한 가지 분야에만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찍먹 해봐서 자신이 어떤 걸 좋아하고, 잘하는지 알아내는 게 훨씬 좋다.
어린 시절의 우리는 어른이 되면,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해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이상이 아닌, 현실을 보게 된다. 새내기 때, 자신은 세상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될 거란 포부를 갖는다. 하지만, 취업 시즌이 되면 몇 년 전까지 세상을 이끄는 리더가 되자는 포부는 사라지고, 회사의 일원으로 자신을 좋게 봐주기만을 소망한다.
인간은 남들이 봤을 때, 안 좋게 보이는 부분을 감추려는 버릇이 있다. 자신의 포부 없이, 그냥 큰 회사에 지원하고 입사한 걸 숨기고 싶어 한다. 그 대신, 더 많은 걸 배우고 빠르게 성장하고 싶다는 말로, 이를 포장한다. 오히려, 이렇게 감추고 싶은 부분을 직면하는 게, 더 올바른 선택을 내리는데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이상은 이상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이상에 갇혀 사는 게 아니라, 현실은 최대한 이상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현실과 이상, 둘 다 온전하게 직면할 필요성이 있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차이를 모르는 상태인데, 어떻게 현실을 이상으로 만들 수 있을까?
대학생 신분으로 가장 잘한 선택이 뭐냐고 묻는다면, (1) 포트폴리오와 (2) 브런치라고 답할 것이다. 필자는 첫 번째 회사인 메이아이를 퇴사하고, 나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포트폴리오와 블로그를 시작했다. "서비스를 만드는 것"과 "서비스를 파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제 아무리 좋은 서비스를 만들어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라는 가치도 마찬가지다. '나'의 가치를 표현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블로그를 시작한 지 10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책과 기사 출판, 멘토링 요청, 스카웃 등 너무 많은 기회를 얻었다. 요즘 들어 든 생각은 좀 더 어렸을 때, 내 경험과 성장 이야기를 대외적으로 보여줬다면, 더 많은 기회를 얻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우울한 사람은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정말로 우울하면 행복하지 않을까? 우울한 건 잘못된 걸까? 우울한 감정은 인간에게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좋은 것보다 나쁜 것에 더 강하게 반응한다. 우울한 감정이 들이닥치면, 이 감정의 파도에 휩싸여서 모든 일이 재미가 없고 멈추게 된다. 그리고, 이 멈춘 시간은 자신을 더 깊게 돌아보는 시간이 된다.
애초에 우울한 감정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우울함을 잘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없이 침체된 감정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충분하다 싶으면 벗어나면 된다. 그러나, 우울함을 벗어나는 게 자신의 의지대로 쉽게 되지 않는다. 이때, 우울함을 떨쳐낼 나만의 방법을 알고 있다면 훨씬 도움이 된다. 필자의 경우, 우울함을 떨쳐내기 위해 물담배와 러닝을 한다.
물론 이 모든 건 지극히 주관적이다. 지난 7년의 대학 생활에서 내가 내린 경험의 깨달음일 뿐, 다른 사람에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이 글을 읽는 대학생은 자신만의 답을 찾아야 한다. '나'의 답은 '나'가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