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 우리 아들은...
Helplessness
아들을 사교육에만 의존하며 내가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했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 돌아보니, 아들은 어쩌면 학습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상태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학습 무기력은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 1942–)이라는 미국의 심리학자가 제안한 이론이다. 마틴 셀리그먼은 현대 심리학에서 긍정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을 이끈 선구자이며, 그의 연구는 심리학이 단순히 정신 질환의 치료를 넘어, 인간의 긍정적인 특성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큰 기여를 했다. 그가 제안한 학습 무기력은 반복적인 실패나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경험이 개인에게 어떤 행동을 시도해도 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신념을 형성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무기력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학습하게 된다는 개념이다.
아들이 어릴 적부터 영어유치원에 보내지는 못했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영어와 수학 학원을 꾸준히 보냈다. 유치원 시절에는 파닉스 수업을 따로 등록시켜 영어에 대한 기초를 마련하려고 했고, 초등학교 시절에도 학원을 중심으로 학습을 지원했다. 하지만 직장 생활로 바빴던 나는 아들의 학습 과정을 꼼꼼히 살피거나 학원 숙제를 챙기고 독려할 시간과 여력이 부족했다. 학원에 맡겨두면 기본은 다질 거라 믿으며 안도했지만, 정작 아들의 성적은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없어 학교에서 석차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학원에서 시행되는 시험 점수를 보면 결과는 늘 50점 미만이었다. 학원을 다닌 기간도 꽤 길었고, 나름대로 열심히 다니는 것 같았는데, 왜 점수가 이렇게 낮은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단순히 아이가 아직 어리고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크면 스스로 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고 자기주도 학습을 할 거야.’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하며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도 성적은 별반 차이가 없었고, 아이는 산만하고 집중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ADHD가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고, 학원 선생님들조차 아들이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집중력을 유지하기 어려워 보인다고 했다. 이런 평가를 들으면서도 나는 단순히 ‘아직 준비가 덜 되었을 뿐이다’라고 생각하며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큰 결심을 했다. 아들의 학습 환경을 완전히 바꿔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대치동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대치동은 엄격한 학원 환경과 체계적인 관리로 유명했기에, 그곳에서라면 아들의 성적도 오를 거라고 기대했다. 실제로 대치동 학원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엄격하고 체계적이었다. 같은 서울 안에서도 이전 동네 학원은 부활절, 크리스마스 등 이벤트와 함께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수업이 진행됐지만, 대치동 학원은 전혀 달랐다. 4시간 동안 꼬박 수업과 문제풀이가 이어졌고, 수업 방식과 학습량 모두 훨씬 강도 높았다. 처음 이곳에 적응하는 데 아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매일 긴 수업과 반복되는 학습 부담에 힘들어했고, 한동안은 학원에 가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코로나19가 유행하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대치동으로 이사한 이후, 6학년과 중학교 1학년 동안은 학교에 등교하지 못하고 온라인 수업과 단축 수업으로 대체되었다. 학원 역시 예전처럼 엄격하게 수업을 운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분위기가 느슨해진 것 같았다. 이 시기를 적응 기간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아들이 공부에서 더 멀어지는 계기가 된 것 같아 안타까웠다.
중학교 2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학교에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치르기 시작했지만, 성적은 여전히 저조했다. 수학 점수는 50~70점대에서 시작했지만 점점 시험 난이도가 높아지면서 실수가 많아졌고, 중학교 3학년 때는 16점이라는 충격적인 점수를 받은 적도 있었다. 학원 선생님들과 아들은 시험이 어렵고 시간 내 문제를 풀다 보면 실수를 하게 된다고 말했지만, 과연 이런 상황이 2년 이상 지속될 수 있는 일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 1학년 1학기 기말고사에서는 아들이 수학을 거의 포기한 듯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오래 다니던 학원을 옮기게 되었다. 조금 더 강도 높은 수업을 제공하는 학원으로 옮긴 뒤, 2학기 중간고사에서 성적이 60점대로 올랐던 적도 있었지만, 기말고사에서는 다시 30점대로 떨어졌다. 아들은 여전히 시험 시간에 실수를 많이 했다고 했지만, 나는 이제 단순히 실수로 치부할 수 없는 문제라고 느꼈다.
이런 시간이 쌓이고 쌓이면서 나도 모르게 아들을 ‘수학을 잘하지 못하는 아이’로 규정짓고 있었다. ‘60점만이라도 받아주면 좋겠다’고 기대를 낮추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어느새 아들도 나도 모두 학습에 대해 무기력한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학원에서조차 수업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문제가 시작된 것일까? 그동안 내가 놓친 건 무엇이었을까? 이제는 아들과 함께 공부하며 진지하게 고민하고,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며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