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동행
요즘은 여간해선 나가기를 꺼리는 나인데도, 여전히 나를 찾아주는 고마운 후배들이 있다. 그렇게 고마운 이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은연중에라도 으레 자기 견해를 내비치게 마련이고, 그러다 가끔은 정작 누구보다 자신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나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곤 한다. 때로는 곧바로 이실직고할 때도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다. 우리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는 이야기 중에 과연 직접 고민해 보지 않은 문제가 얼마나 될 것이며, 그중에서도 이제는 옛이야기처럼 희미해진 고민은 또 얼마나 될까?
영영 오지 않으려나 싶던 가을은 이토록 깊숙이 들어와 있고, 이제는 어느덧 11월을 향해 가고 있다. 이쯤 되면 트렌드 코리아를 필두로 내년엔 시류가 어떠할지, 미리부터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엄밀히 말하자면 트렌드를 간절히 필요로 할 가능성이 더 높긴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 또한 계절 감기처럼 연말이 가까워져야 벌어지는 일시적 유행이라는 거다. 예측을 위한 이야기는 말을 위한 말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채우는 것만이 목적인 빈칸은 여백을 쉬이 용납하지 않는다. 이는 결국 자신이 필요해서 직접 그려 놓은 밑그림에 불과할 테니까.
이제는, 설령 패션이 아닌 분야에서도, 그 모든 게 패션이 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서로를 멀리하던 그 시절 반짝이던 골프가 테니스로 넘어갔듯이. 지금은 또 많은 이들이 뛰어다니느라 분주하듯이, 결국 패션. 불타던 열정이 식고 난 후에 남게 되는 건 스포츠가 아니다. 한때는 디젤차를 찬양하다가 환경을 언급하며 넘어온 전기차를 이제는 지하에 주차하기가 괜스레 민망해져 버렸듯이. 우리가 일상에서도 늘 보아 오던, 낯익은 풍경일 뿐이다. 실은 그들도 잘 모르는 터라, 그저 팔고 싶은 걸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국내에선 아직까지 잘 통한다는 사실이 애처로울 뿐이다.
연애를 글로만 배워서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것처럼, 일 년에 단 한 번만 최신 유행에 맞춰 윈도우를 업데이트하듯 동기화를 시키는 게 과연 맞는 방법일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라도 이제는 트렌트라는 선심을 선뜻 받아들이기가 쉽지만은 않다. 예컨대 너를 위한다는 지금의 나 또한 마찬가지다. 자기를 전혀 위할 줄 모르는 순수한 배려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걸까? 어쩌면 너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내 모습 그 자체를 사랑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는데.
유행 양산의 이면에는 결국 객보다는 그들 자신을 배려하기 위한 셈법이 적용되어 있다. 문제는 하나의 커다란 붐이 사라지고 나면, 정작 그들조차 여태 뭘 만들고 어떻게 팔아왔는지를 헷갈려 하더라는 거다. 여담이지만 요즘 떠들썩한 책들도 당장 급한 게 아니라면, 내년에 구매하기를 추천해 드린다. 여느 용품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땐 분명 충분한 여유가 생길 테니까. 개중에도 취향의 발견으로 잔류에 성공한 일부만이 내년에도 읽거나 달리고 있지 않을까란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대유행이 사라져야 극적인 비수기 또한 없어질 것 같은데. 때맞춰 이런 걸 쓰고 있는 나 자신 또한 떳떳하지가 않다. 이마저도 결국 패션일 뿐인 건가. 자기 주관을 지켜낼 줄 아는 사람만이 새로운 시류를 만들 수도 있을 것만 같은데… 이깟 글이야 얼마든 고칠 수 있겠지만, 마음만은 개운치가 않다. 이제는 트렌드와의 불편한 동행을 끝마칠 때가 됐나 보다. 세상을 향해 곁눈질만 하기보다는 자신을 믿고, 마음이 이끄는 그곳을 향해 그저 나아가려면 더욱이.
여느 관계가 그러하듯 그것만을 따를수록 더욱이 멀어져만 가는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