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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방계 소녀 Oct 23. 2024

내가 아닌 계절

이 가을의 끝


혹시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으신가요? 


온종일 책상 앞에서 글 하나를 붙들고 있노라면 오히려 수학이 더 쉬웠을 것 같다고. 차라리 학업에 이만큼 매달렸더라면 지금쯤 뭘 하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 말이에요. 당장 누구한테라도 이런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딱히 말할 데도 없어서요. 평소엔 안 하던 이런 상상을 괜스레 하게 되는 건 아무래도 제 마음이 청명한 하늘만큼이나 평온해진 탓일 겁니다. 여름엔 한낱 더위에도 무참히 흔들리고 마는 저라서요. 


분명 예전엔 봄을 더 좋아하던 제 마음이 자꾸만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너무 오래 기다린 탓일 겁니다. 어차피 짧은 건 매한가진데도 말이죠. 스쳐 지나기에 더 소중해지는 것들, 그중에서도 훗날 가장 아쉬워지는 건 아무래도 시절이라는 걸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아서요. 예전엔 미처 몰랐던 이 계절의 묘미를 말이죠. 


실은 연재를 하는 도중에 감사한 기회를 얻어서 난생처음 글이란 걸 배워볼 수 있었습니다. 딴에는 더듬더듬이나마 초고를 가다듬던 과정도 정작 퇴고 수준은 아니었음을 처음 깨닫기도 했고요. 덕분에 나 같은 사람이 계속 써도 되나 하는 절필의 위기도 찾아왔었습니다만, 보시다시피 꿋꿋이 이겨내는 중입니다. 글을 왜 하필이면 짓는다고 하는 건지도 그제서야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 브런치북을 만들 때 염두에 두었던 목차 상의 글들은 이제 저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날의 저는 마음속 깊은 곳에 고이 묻어두었으니까요. 나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은 내가 바라는 글과의 거리만큼이나 쉬이 좁혀지지도 않아서, 내가 되고 싶은 나만을 바라보고픈 충동이 자꾸만 듭니다. 어떤 날엔 어떤 나를 고를지, 이러한 위협이 늘 도사리고 있는 게 글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대체 어느 계절이 진짜 제 모습인 걸까요? 


물론 앞으로도 이러한 궁금증은 끊이질 않겠지만, 이게 나였으면 하는 계절과 내가 아닌 것만 같은 계절 모두를 인지한다 해도 제가 기대하는 만큼 달라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내가 아닌 계절이 더더욱 저 같을지도 모르니까요. 아무래도 이 가을은 이쯤에서 보내주는 게 맞겠습니다. 말과 글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다 괜히 내 안의 괴리감만 더 커지는 건 아닐는지, 이런 제가 저조차도 헷갈리기 전에 말이죠. 글이란 혹여 선택적 자아만을 송출해 내는 가장 위험한 도구가 될지도 모릅니다. 


가을에 시작한 야구도 어느덧 겨울로 넘어가는 지금, 올해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새파란 목폴라를 한 라이온즈 선수들을 볼 수 있겠습니다. 십 년 전 그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우리의 암흑기가 이렇게나 길어질 줄은. 2002년 그때에도 설마 자국에서 치러지는 월드컵에서 4강까지 올라갈 줄 미리부터 알았더라면, 분명 입대를 연기했을 테고 말이죠. 뿐만 아니라 그해 가을엔 무려 17년 만에 삼성라이온즈가 우승을 거머쥐게 된 것까지, 차라리 그 모든 게 꿈이기를 군인인 저는 바랐습니다. 


때아닌 가을비에 어제는 광주에서 한국시리즈 사상 초유의 서스펜디드 게임까지 벌어지긴 했지만, 요즘 제게는 글이 꼭 그러하듯, 야구 또한 미칠 수 있을 때 미쳐보기로 했습니다.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이제 잘 알지만 무작정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나도 빠르다는 것도, 알맞은 시기란 실은 없다는 것도 여러 번 놓쳐본 후에야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신은 인간에게 좋은 시절을 제때 알아보는 능력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럭저럭 돌다 보니 어느덧 마흔두 바퀴, 이제는 천천히 가는 법도 좀 배워 볼 차례인가 봅니다. 내가 아닌 계절에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물론 슬프지만, 하필이면 그게 나라는 건 더 애처로운 일이니까요. 지금부터는 나를 좀 더 유심히 관찰해 보는 겁니다. 물론 전부 다를 인정하고 싶진 않겠지만 내가 아닌 계절은 앞으로도 없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하는 것만이 진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은 늘 해왔었습니다. 제가 지금 겪고 있는 성장통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고, 그만큼 티도 나지 않는 일을 이렇게나 열심히 해본 게 언제였던가 싶더라고요. 그럼에도 글을 짓고 있는 이 시간이 저는 너무나 좋은걸요. 아시다시피 그거면 된 겁니다. 아무쪼록 내년엔 일말의 후회도 차라리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산뜻한 가을이 모두에게 깃드시기를. 


저 또한 마냥 기다리지는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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