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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앓이 Jun 05. 2018

돈키호테라면 이룰 수 있는 꿈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후기

우리에게는 『돈키호테』의 저자로 익숙한 세르반테스는 법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일념 하에 세금을 내지 않는 교회를 저당 잡은 죄로 종교재판을 앞두게 된다. 지하감옥에서 종교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함께 갇혀있는 죄수들에게 또 다른 재판을 받는데, 본인을 검사로 칭한 죄수는 세르반테스를 이상주의자, 엉터리 글쟁이에 고지식한 인간으로 기소한다. 세르반테스는 본인을 유죄로 인정하면서 변론의 기회를 요구한다. 변론의 방법으로 ‘돈키호테’를 함께 공연하자는 세르반테스의 제안에 죄수들은 응하고, 그렇게 감옥에서의 연극은 시작된다.



노쇠한 시골 지주 알론조 키하나는 현실 감각을 살짝 잃고 나이도 잊은 채 본인을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로 착각하여 산초와 함께 모험을 떠난다. 풍차를 괴물로 착각하는 『돈키호테』에서의 유명한 장면도 당연히 이 모험의 일부로 등장한다. 돈키호테는 기사 책봉을 받기 위해 한 성을 찾아가는데, 이곳도 사실은 질 나쁜 노새끌이들로 가득한 주막집이다. “엄마 얼굴도 모르고 아버지 성도 모르는” 알돈자를 “하늘에서 내린 여인” 둘시네아라고 부르고, 주막집 주인을 성주로 여기는 등 세르반테스의 연극에서 이상과 현실은 뒤섞인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이상과 현실의 대립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실제로는 빼빼 마르고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는 알론조는, 그의 상상 속에서는 용맹하기 그지없는 라만차의 기사이다. 허상에 빠진 돈키호테에게는 창녀 취급을 받으며 주막집에서 일하는 알돈자도 그의 레이디 둘시네아일 수 있고, 이발사의 세숫대야도 맘브리노의 황금투구가 될 수 있다. 풍차를 괴물로 착각하고, 주막집을 기사 책봉을 받을 수 있는 성으로 착각하고, 겉모습만을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며 집시들을 의심하지 않다가 가진 것을 몽땅 털리는 등, 돈키호테는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한다.
 


주막집 안에서도 이상과 현실의 대립을 찾아볼 수 있다. 이상을 가진 채 살아가는 돈키호테와 산초와 달리 나머지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 알론조의 조카 안토니아와 그녀의 약혼자 키라스코, 가정부와 신부는 돈키호테가 아닌 알론조를 만나고 싶어 한다. 액자식 구성인 극 안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세르반테스와 죄수들에게는 지하 감옥이 현실이지만, 연극 속에서만큼은 라만차에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지하 감옥 재판에서 세르반테스의 죄목이 이상주의자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검사를 맡은 공작이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를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하는 미치광이라 비난하자, 세르반테스는 “현실은 진실의 적”이라 답한다.
 
현실과 이상, 둘의 관계가 진실과 거짓의 그것과 늘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진실일까. 경험주의 철학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라만차가 황무지라는 세르반테스의 말에 공작이 다시금 미치광이나 살 곳이라며 힐난해오자 세르반테스는 꿈도 없고 이상도 없던 본인의 군인 시절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장에서 죽어가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왜 죽어가는가를 물은 것이 아니라 왜 살아왔는가를 물었다고 한다. 세르반테스는 절규한다. “미쳐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미친 짓은 현실에 안주하고 꿈을 포기하는 것이라오.”



자신을 둘시네아라고 부르는 돈키호테에게 매번 짜증만 내던 알돈자도 그에게 점차 마음을 연다. 돈키호테로부터 받은 서한에 오글거려 하면서도 잠시 웃음 지었던 것을 시작으로, 이룰 수 없는 꿈과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대한 돈키호테의 노래 후에는 본인을 괴롭히는 노새끌이 무리에 맞서 함께 싸우기까지 한다. 돈키호테 덕분에 잠시나마 가졌던 알돈자의 희망은 이후에 노새끌이들에게 짓밟힌다. 그 순간 그녀에게 돈키호테는 그녀를 “짓밟고 지나간 수많은 놈 중에 가장 잔인한” 사람이다.

그 어떠한 역경과 놀림에도 끄떡없던 돈키호테를 무너뜨린 것은 알론조를 제정신으로 되돌려 놓기 위한 카라스코의 계략인 거울의 기사들이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용감하고 대담한 라만차의 기사 혹은 슬픈 수염의 기사 돈키호테가 아니라, 허약한 미치광이 노인네였다. 마침내 그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세르반테스가 이 장면을 끝으로 연극을 마치려 하자 죄수들이 반기를 든다. 세르반테스고 돈키호테고 미친 소리만 한다며 비난하던 사람들이 어느새 돈키호테의 절망을 결말로 받아들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즉흥적으로 쓰인 결말에서 알돈자와 산초의 도움으로 알론조는 돈키호테로서 보냈던 시간이 꿈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새로운 모험을 준비한다. 하지만 제대로 발을 떼기도 전 돈키호테가 끝내 숨을 거두자, 슬퍼하던 알돈자는 말한다. 본인의 이름은 둘시네아이고, 돈키호테는 죽지 않는다고. 그렇게 연극을 끝내고 마침내 종교재판을 받으러 가는 세르반테스에게 지하 감옥 재판의 판사인 도지사는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는 형제라고 말한다. 그에 세르반테스는 우리 모두가 돈키호테라고 대답한다.


이렇듯 시나리오는 탄탄하다. 뜬금없는 부분 하나 없이 사건들은 개연성 있게 전개되고, 인물들 또한 극 안에서 엇나가는 지점 없이 제 역할을 해나가는 느낌이다. 지하감옥과 라만차를 오가는 무대 세트는 말할 것도 없고, 현실을 대변하는 푸른색과 이상을 대변하는 붉은색이 도드라지는 의상 디자인도 극의 메시지 전달에 힘을 실어준다. 울림 있는 가사를 기반으로 중간중간 위트 있는 대사들도 돋보이고, 덕분에 극의 분위기 자체도 무거움과 가벼움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처음 들어도 귀에 감기는 작곡은 첫 넘버부터 흥겹다. 돈키호테와 산초가 부르는 ‘라만차의 사나이’와 알돈자와 노새끌이들이 부르는 ‘다 똑같아’, 주제는 같지만 완전히 다른 의미의 가사를 담고 있는 ‘둘시네아’와 ‘알돈자’가 동일한 혹은 조만 달리 한 음악을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계속 레프리제가 이루어지는 ‘라만차의 사나이’, ‘둘시네아’와 ‘이룰 수 없는 꿈’은 다른 맥락에서 등장함에 따라 관객의 가슴을 뛰게 만들기도 하고, 눈물이 차오르게 만들기도 한다. 신부를 가운데 두고 안토니아와 가정부가 고해성사를 하는 ‘그분의 생각 뿐’은 위의 넘버들에 비하면 핵심도 아닌 것 같은데 극장을 떠날 때면 귓가에 맴돌아 괜히 웃음이 나게 만든다.



필자에게는 구멍 하나 없는 극으로 여겨지지만, 불편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면 거짓말임을 인정한다. 1965년에 브로드웨이에서 초연이 이루어졌던 공연인 만큼 요즘 우리나라에서 핫한 주제인 페미니즘 관점에서 보면 비난을 결코 피해갈 수 없다. 관객이 제작 시기를 감안해야 하는 것인지 혹은 제작사에서 대사 하나부터 역할 설정까지 바꿔야 하는지는 양측 모두에게 찬반양론이 맞서는 난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관객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작곡이 좋은 수작으로 회자되는 것을 보면 전근대적인 젠더 감성만으로 관람을 포기할 수는 없는 작품임은 분명하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현실과 이상 중 옳은 것을 가려내려고 하지 않는다. 둘 중 하나는 참이고 하나는 거짓인 이분법적인 결말을 내놓지 않는다. 잠을 자고 있지 않는 이상,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살아간다. 그렇다고 해서 꿈도 이상도 없이 살아갈 필요는 없다. 밝은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이 있다면, 태양의 흔적마저 찾아볼 수 없는 밤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언제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미쳐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는 형제이고, 우리 모두가 돈키호테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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