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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안후라이안 Feb 01. 2020

책장 파먹기

일러두기 하나. 어쩌자고 이런 걸 쓰기 시작했을까요

네, 맞습니다.

냉장고 대신 책장을 파먹기로 한 거예요.

우리 집 냉장고는 파 봤자입니다. 책장이 훨 낫죠. 파는 재미가 있을 거예요, 분명! 그렇대도 책을 사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비행기 티켓 다음으로 만족도가 큰 쇼핑 목록이라서요. 한동안 유행하던 미니멀라이프 같은 거냐고요? 아뇨, 저는 그런 것 모릅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음을 알 뿐이지요.


햇수로 5년째 쓰고 있는 노트북이 업그레이드를 한다면서 수시로 드러눕는 바람에, 작업을 중단하고 낑낑거리며 인증샷을 찍다가 문득 깨달았죠. 아, 책이 너무 많구나(제가 기억할 수 있는 정도가 적당하다는 게 제 기준입니다). 언뜻 보아도 책상 맨 앞줄에 놓인 책이 서른대여섯 권이 됩니다. 네 줄을 쌓았으니까 적어도 백이십여 권, 많으면 백육십여 권이 책장도 아니고 책상을 차지하고 있는 셉입니다. 이번 기회에 이백 권 정도만 정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어요.


방에는 안쪽 가로 폭이 75센티미터 정도 되는 것 두 칸, 그 반쯤 되는 것 한 칸에 합판을 가로질러 얹는 형식의 책상이 딸린 책장이 있어요. 아, 물론 이 책상 판을 받치는 낮은 책장 칸에도 책이 한가득입니다.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할 때 큰 것 하나를 가득 채우던 책을 몽땅 비우고, 그 책장 칸은 버렸더랬죠. 남은 책장에 일렬로 나란히 책을 채우고, 그러고도 공간이 부족하면 책 위 공간에 비스듬히 쌓았습니다. 어느 날인가부터는 이마저도 여의치 않아 책상에 세로로 세워 넣어야 했어요(바닥에 쌓으면 청소가 어려우니까요). 지금은 어떻게 되었냐고요? 네, 저는 좌식 테이블로 쫓겨나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노트북으로 일도 하고, 글도 씁니다. 원래 책상이 넓어도 잘 쓰지 않기는 합니다만, 책상을 '안' 쓴다면 모를까, '못' 쓰는 건 왠지 억울하더라고요.


책장을 정리하는 얘기를 써보려 한다고 했더니, 한 친구가 들려준 얘기가 있습니다. 책장을 보면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기 때문에, 책장을 보여주기를 극히 꺼리는 사람도 있다는 거였죠. 제 책장은 아마 저를 완벽하게 보여주지는 못하리라 기대해봅니다. 서점에서 한 줄 읽고는 좋아서, 표지가 예뻐서, 제목이 맘에 들어서, 종이 질감이나 책을 묶는 형식이나 종이를 자르는 방법이 독특해서 충동구매하기도 하거든요. 도서정가제가 시행된 이후로는 드문 일이 되었지만, 반값으로 할인해서 파는 책을 몽땅 산 적도 있고요. 책을 소개하는 칼럼을 쓰기 위해 샘플로 받은 신간도 꽤 있습니다. 아, 이 얘기가 왜 이렇게까지 구구절절하냐고요? 그게, 저는 저에 대해서 얘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차차 말할 기회가 생기겠죠(물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만)?


올해 여름에는 이사를 가야 합니다. 봄에는 조금 길게 먼 곳으로 여행을 가려고요. 그래서 그전까지 남은 석 달 동안은 책장을 파먹어볼 요량입니다. 다 읽고서 누군가에게 줄 책, 여러 번 읽었는데도 남겨서 또 읽을 책, 아직 읽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읽을 책, 아직 다 읽지 못했음에도 버려져야 할 책... 팔아도 좋을 책과 그렇지 못한 책을 고르며 책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 합니다. 아, 문득 고개를 들어 책장을 봤는데 기분이 묘하네요. 보내주고 싶지 않은 맘이 잠깐 일렁입니다. 아마 늦은 밤이라 그런가 봅니다(먼 산을 바라봅니다). 그나저나 책 팔아 얻은 돈은 어디에 쓰게요? 그게요, 책 사 먹으렵니다. 복권 당첨금으로는 다시 복권을 사서 숫자를 맞추고, 술병 판 돈으로는 또 술을 사 마시듯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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