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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안후라이안 Feb 07. 2020

종이 낭비하기

일러두기 둘. 말과 글에 높낮이가 있을까요

"말 편하게 해도 되지?"

이런 질문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한쪽은 편하지만 다른 한쪽은 불편해지자는 제안이지만 거절하기 쉽지 않죠. 편하게 말하는 쪽에는 분명 힘이 실립니다. 불공평하죠. 그래서 저는 말이나 나이로 쉽게 얻은 권위를 무의식 중에라도 휘두르지 않으려고 후배나 부하직원에게도 높임말을 씁니다. 그래도 글은 보통 예사말로 씁니다. 마치 누가 그러라고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요.

이쯤 되니 궁금증이 생깁니다. 말과 글에는 높낮이가 있을까요?


대부분의 책은 문어체 예사말로 적습니다. 한정되어 있는 지면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담기 위해서지요. 우리는 모두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밀린 방학 일기를 최대한 빨리 써 내려가기 위해 단 몇 자라도 더 적을 수 있는 높임말을 선택했던 그 경험 말입니다. 책을 만들 때는 그 반대입니다. 종이를 버리지 않기 위해 몇 페이지인가를 덜어내거나 보태거나 한다는 걸 모르는 분이 더 많을 겁니다. 한 가지 힌트를 드리자면, 책 표지를 뺀 페이지 수가 대부분 16이나 8의 배수라는 겁니다. 그도 어렵다면 4의 배수라도 맞추고요(인쇄소에서는 이제 돈땡을 계산하겠지만,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책 만드는 사람들이 매 과정마다 얼마나 종이를 아끼고 있는지 모릅니다.


종이 아끼는 작업만 해오다가 구어체 높임말을 적기로 마음먹은 건, 한동일 교수의 책 <라틴어 수업>의 영향입니다(온라인 페이지에서만 끼적이는 글이기도 하고요). 대학 강의를 그대로 옮겨놓는다는 콘셉트가 이 책의 기획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점잖은 지식인이 아주 겸손하게 라틴어 글귀를 인생에 빗대 풀어냅니다. 어찌나 따뜻한지, 이분을 만나게 된다면 손이라도 덥석 잡아보고 싶어질 정도예요.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보다 더 큰 힘을 갖기 쉽지만, 그는 사려 깊고 배려 넘치는 문체로 제자들을 위로합니다.

다만, 흉내라도 내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지 책에 정통한 사람은 아닙니다. 이런 부족함을 표현할 길이 뭐가 있을까, 찾아보다가 높임말을 써보기로 한 거죠. 신나게 종이 낭비, 아니 화면 낭비를 해보기로 합니다.


*높임말로 쓴 책 몇 권을 더 꺼내왔습니다.

<소설을 쓰고 싶다면>은 제임스 설터의 산문집입니다. 퇴사를 결심할 때쯤 샀고, 끼워준 엽서는 사무실 책상 파티션에 붙여두고 자주 보았습니다. 책의 원제는 <The Art of Fiction>으로 에리히 프롬의 책 제목을 떠올리게 하죠. 제 기억이 맞다면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은 '이것은 사랑의 테크닉에 대해 기술한 책이 아니다'라는 얘기를 했던 것 같네요. 제임스 설터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쓸 수 있었는지와 자신이 어떻게 글을 쓰는지에 대해 어렴풋하게만 알려줍니다. 그래서 더 믿음이 갑니다. 부사를 쓰지 마세요, 말줄임표를 활용하세요... 이런 기술과 기교는 배워봤자 별 도움이 안 되더라고요.


이기호의 소설집 <김 박사는 누구인가?>에 실린 동명 단편소설이 제일 먼저 떠올랐습니다. 김 박사를 찾는 여성이 높임말을 씁니다. 같은 여성이 읽기에도 조금 낯간지러운 말투입니다(마지막에는 "김 박사, 이..."라는 문장이 나오니, 아마 의도된 장치인 걸까요?). 재밌습니다. 우리나라 작가의 신선한 단편소설집을 읽고 싶다면 딱이죠.


모리미 도미히코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스무 살 때인가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서 몇 년 전에 산 책입니다. 그때는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고요. 풋풋한 짝사랑 얘기가 판타지랑 얽혀 있어서 가볍게 읽기 좋습니다. 남자 선배와 여자 후배가 번갈아 독백을 하는데, 여자 후배만 높임말을 씁니다.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남성 독자 제현, 세상에 이련 여자는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도 책이 자주 등장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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