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이안후라이안 Mar 16. 2020

삶의 테마 정하기

당신의 지금은 어느 문장을 짚고 있나요?

문득 몸 안쪽으로 허전함이 가득 차오를 때가 있지 않나요? 이제 몸집이 너무 커버려서 누군가에게 매달리거나 기대는 것도 쉽지 않은데 말예요. 이럴 때 저는 책장에 기대고 책에 매달립니다. 뾰족한 책장 모서리에 이마를 대고, 지금 당장 필요한 문장들을 들춰보는 거예요.


어떤 때는 딱 한 문장만 꺼내서 읽을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한참을 그대로 붙박여 몇 시간이고 읽어 내려갈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을 펴는 겁니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들에다는 많은 바람을 풀어놓으십시오...

<가을날>이라는 시예요. 엄마가 20대 때 일기장에 베껴놓은 것을 보고, 릴케를 좋아하게 되었거든요(우리 엄마는 당신의 일기장을 우리가 아무 때나 읽을 수 있게 해 주었답니다. 엄마도 참!). 저는 지금 어떤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가 되었다'란 저 평범한 문장이 불안한 마음을 다독입니다. 언제고 '때'는 옵니다. 저는 아마 이 '때'라는 것을 살면서 두고두고 기다릴 듯합니다. 릴케의 시집도 제 책장에 내내 있을 테지요.


어릴 때는 조숙한 꼬맹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을 많이 읽었습니다. 저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서요.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과 J.M. 데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 오렌지>와 은희경의 <새의 선물> 등등. 조숙하지만 미숙한 주인공들은 모두 저와 닮아 있었고, 위로가 되었어요. 지금도 친구 중 한 명은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에서 저를 떠올린다는데, 저도 이 소설을 좋아할뿐더러, 네, 저는 이 어설프기 짝이 없는 소설 속 주인공 도련님과 비슷한 데가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오늘 끄집어낸, 요즘의 제 테마는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입니다. 기형도요. 저는 이 시에서 르네 마그리트의 <회귀>를 봅니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 이렇게 여러 번 시를 곱씹어보니 어쩐지 또 몇 날은 잘 살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아요.

제 얘기를 실컷 했으니 묻고 싶어지네요. 당신의 지금은 어느 문장을 짚고 있나요?

매거진의 이전글 싫다면 건너뛰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