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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안후라이안 Apr 18. 2020

본캐와 부캐 정하기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해 볼까요

어느 날인가는 살아간다는 게 게임 속 '스테이지 클리어(Stage Clear)'의 연속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냥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타박타박, 천천히 걷고 싶은데 누군가 자꾸만 재촉합니다. 심지어는 잘 모르는 사람들까지요. 더 빨리 뛰어요, 그러다가는 영 늦어져요, 그건 남들보다 뒤처지는 일이에요.... 이번 생이라는 게임에서 제 목표는 화려한 아이템을 장착하고 순위에 오르려는 게 아니에요. 그럭저럭 잘 살아남아 좋아하는 것들을 누리는 소소한 기쁨이 있다면 그만이지요.



존 테니얼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삽화로 만든 카드. 책을 잔뜩 사고 사은품으로 얻어냈던 그때의 기쁨이란!



키우는 캐릭터는 아주 어릴 적에 이미 정해두었습니다. 본 캐릭터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입니다. 네, 맞아요, 루이스 캐럴이 쓴 동화 주인공이죠. 말도 안 되는 모험에 겁 없이 뛰어드는 꼬맹이. 막막해지면 엉엉 울고, 아무하고나 쉽게 친해지고, 최대한 친절하려고 노력하지만 때로는 고집스럽고 괴팍한 성격을 드러내는 긴 고수머리 여자아이. 어째서 그렇게 앨리스에게 매력을 느끼고 감정이입을 했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성격이 비슷했기 때문일까요?). 존 테니얼이 그린 삽화 속 앨리스를 예쁘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웃는 대신 미간을 잔뜩 구긴, 신경질적인 표정을 짓고 있거든요. 때로 숱이 많은 머리에 뿌리부터 부글부글하게 파마를 마는 것은, 앨리스가 제 본캐이기 때문입니다(새로운 힘을 내게 하는 아이템이라고 해둡시다, 히히).



왼쪽은 아서 래컴이 그린 앨리스고, 오른쪽은 존 테니얼이 그린 앨리스. 아서 래컴의 그림 속 앨리스가 더 예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본캐는 존 테니얼의 괴팍한 앨리스입니다.



부 캐릭터는 여럿입니다. '말괄량이 삐삐(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소설 제목이자 주인공)'와 '짐 호킨스(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보물섬> 주인공)'와 '후치[이영도의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드래건'이 표준어입니다만)> 주인공]'예요. 삐삐한테서는 만사태평하고 느긋한 성격을, 짐한테서는 용기 있는 모험심을 닮고 싶었습니다. 후치는 사실 무능력한 캐릭터인데요(그래서 제일 비슷한 것 같기도 합니다만). 대신 OPG(Ogre Power Gauntlet)라는, 오거의 힘을 낼 수 있는 장갑을 하나 얻어 주 무기로 사용합니다. 수능 끝나고 하루에 네 권씩 몰아서 읽었으니 열아홉 살 때인데 그때는 이 설정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듯해요. 제게 OPG는 사람입니다. 곁에 있는 좋은 사람들이 볼품없는 저를 돋보이게 해 주니까요. 보물 같은 소중한 사람들. 오늘도 사랑합니다.


지금까지 얘기한 본캐와 부캐에는 공통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모두 어렸을 때 정해두었던 터라('후치'를 제외한 모든 캐릭터는 모두 유년기에 접했거든요) 동화에 등장하는 아이라는 점과 모험을 떠난다는 점입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반에서 제일 키가 작았으며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책을 더 좋아했던 꼬맹이가 어떻게 그렇게 모험 얘기에 매료되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궁금합니다. 밥을 통 먹지 않아 온갖 종류의 입맛 돋우는 약을 먹으며 자랐던 그 꼬맹이는 어떻게 성장기에 다다르자 하루에 여섯 끼씩을 먹으며 몸집을 키울 수 있게 되었는지, 책만 좋아하던 얌전한 아이는 어디 가고 여행을 업으로 삼게 되었는지 말이에요. 본캐와 부캐가 조금씩 꾸준히 발현되고 있는 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삶이라는 게임에는 승자와 패자가 없습니다. 성장하는 캐릭터가 있을 뿐이죠. 스테이지 클리어도 좋겠지만, 그보다는 제 캐릭터 앞에 펼쳐진 세상을 무대 삼아 훨훨 누벼보려고요. 본캐와 부캐를 어떻게 성장시킬지, 또 어떻게 다독여 게임 내내 지치지 않고 안전하게 이끌고 나갈지 고민하다 보면 잊고 싶지 않은 순간들에 맞닥뜨릴 때도 있을 겁니다. 이 모험은 그 순간을 차곡차곡 모아 쌓는 보물 찾기로 정했습니다. 삶이고 제 마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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