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이안후라이안 May 02. 2020

책에 취해 술 읽기 2

작가들은 어째서 술에 열광하는 걸까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버번위스키 브랜드 짐빔은 1795년에 창업한 가족기업이 대를 잇고 있습니다. 사진은 짐빔 공식 인스타그램.



위스키

추리소설에 열광하는 사람이라면 싸구려 버번위스키에 대한 어떤 감각을 갖고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경찰이었지만 삶이 무너지며 사설탐정이 된 사람들이 사건을 의뢰받으면 꼭 싸구려 버번위스키를 마시거든요. 음, 방금 생각난 책은 로렌스 블록의 <살인과 창조의 시간>이에요. 작가의 다른 소설에도 여러 차례 등장하는 주인공 매튜 스커더는 커피에도 버번을 섞습니다(이미 시도해본 저로서는, 시도하지 않길 권합니다. 그래도 꼭 해보고 싶으시다면 차가운 커피에 섞으시길).


옥수수랑 호밀로 만드는 버번은 목구멍을 훑는 촉감이 거칠고 기막히게 좋은 바닐라향이 나고 달콤합니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스트레이트로 마시기에는 알코올 냄새가 끔찍하게 강하다는 것. 어쩔 수 없이 뚜껑을 따고 한참 둬서 알코올 냄새가 빠져나가길 기다린 다음에 마시는 수밖에 없어요. 칵테일로 만들기에는 이 말도 안 되는 좋은 향이 아깝게 느껴집니다. 그러니 그저 아, 나는 지금 사건을 추리하고 있는 한물 간 탐정이구나, 하고 주인공에 빙의해보도록 합니다. 그러면 한두 잔은 그럭저럭 좋습니다.


위스키라고 하면 보통 100% 보리를 증류한 싱글몰트 위스키를 떠올리며 비싸다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요걸 스코틀랜드에서 만들면 스카치라고 부릅니다). 가격이 상당하죠. 이런 걸 거친 탐정이 마실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추리의 미궁에 빠져 허우적대다 벽장을 뒤져 찾는 위스키는 고급스러우면 안 되는 거죠, 암요.


국내에서도 가장 흔하게 살 수 있는 버번 브랜드로는 짐빔이 있습니다. 대형 마트에서도 파는데, 저렴하다고 하기에는 값이 좀 아쉬워요(750밀리리터에 3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던 듯합니다). 그럴 때는 면세 찬스를 써야 합니다. 1리터 들이 한 병을 20달러 안팎으로 살 수 있거든요. 남대문시장도 값이 꽤 저렴하다고 합니다.


찰스 부코스키의 편지에서 글쓰기에 관한 부분만 모아 편집한 <글쓰기에 대하여>에 실린 부코스키의 그림.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 쓰는 사람을 보면 질투가 납니다.




책과 술

미국에서 가장 많이 도난당한 책 <호밀빵 햄 샌드위치>를 쓴 찰스 부코스키는 알아주는 애주가였습니다. <글쓰기에 대하여>를 읽다 보면,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한 듯한 기분이 들죠. 출판사 편집자가 자기 글에 오타가 너무 많다고 투덜댔다는데, 부코스키는 그걸 당연하다고 얘기합니다. 술에 취하지 않고 글을 쓴 적이 없어서 그렇다나요!



나는 여기 와서 동봉하는 시에서 형편없는 행 서너 줄을 꺼내느라 또다시 직장에서 나왔고, 지금은(맥주를 병으로) 열한 병 마시고 취해서 지껄이고 있습니다. 하하, 어디까지 했더라요? -찰스 부코스키, <글쓰기에 대하여> 중


술에는 디오니소스적인, 그러니까 파괴적이면서도 창조적인 힘이 있는 듯합니다. 글 쓰는 사람들-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테네시 윌리엄스, 존 베리먼, 존 치버, 레이먼드 카버, 찰스 부코스키 등등-은 술의 유혹에 매일 허덕였죠. 쓰기 위해 취하고, 쓰지 못해 취하고, 쓰니까 취하는 이 반복적인 광기가 그들을 지탱하는 힘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쉽게 빨리 취하는 저는 335밀리리터짜리 작은 캔에 든 맥주만 마셔도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애주가인 척하며 술에 대해 술술 얘기하더니, 갑자기 태세를 전환했습니다). 분명 몇 글자 읽다 말고 잠들어버릴 테니까요. 잠 오는 것(책) 더하기 잠 오는 것(술)의 강력한 힘이란!


작년 말에 접어두었던 파일 폴더를 열고, 다시 한동안을 글 쓰는 데 집중해보려 합니다. 지난달에 사업자로 등록하면서 준비할 게 많아졌는데 불안한 마음만 커져서 그저 손 놓고 신나게 놀아봤어요. 열흘을 그렇게 흘려보내고 나니 이제 다시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을 듯합니다(그러기 위해 찰스 부코스키를 꺼냈고, 그의 글에서 쏟아내는 술 얘기에 마시지 않고도 매일 취해 있는 기분은 덤이었죠). 술을 마시지 못하는 대신, 무알코올 맥주를 쟁이고 오렌지와 파나마 게이샤 커피를 주문해두었습니다. 한동안은 못 마실 술을 위해 건배!


아무런 의무감을 가지지 않아도 될 일에 열을 올리고 있는 스스로를 열렬히 응원하는, 달콤하고 알싸한 밤입니다.



벨기에에서 태어난 풍속화가 아드리안 브라우버르(Adriaen Brouwer)의 <쓴 술(The Bitter Drunk)>. "어우, 써!"라고 얘기하는 듯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책에 취해 술 읽기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