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버번위스키 브랜드 짐빔은 1795년에 창업한 가족기업이 대를 잇고 있습니다. 사진은 짐빔 공식 인스타그램.
위스키
추리소설에 열광하는 사람이라면 싸구려 버번위스키에 대한 어떤 감각을 갖고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경찰이었지만 삶이 무너지며 사설탐정이 된 사람들이 사건을 의뢰받으면 꼭 싸구려 버번위스키를 마시거든요. 음, 방금 생각난 책은 로렌스 블록의 <살인과 창조의 시간>이에요. 작가의 다른 소설에도 여러 차례 등장하는 주인공 매튜 스커더는 커피에도 버번을 섞습니다(이미 시도해본 저로서는, 시도하지 않길 권합니다. 그래도 꼭 해보고 싶으시다면 차가운 커피에 섞으시길).
옥수수랑 호밀로 만드는 버번은 목구멍을 훑는 촉감이 거칠고 기막히게 좋은 바닐라향이 나고 달콤합니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스트레이트로 마시기에는 알코올 냄새가 끔찍하게 강하다는 것. 어쩔 수 없이 뚜껑을 따고 한참 둬서 알코올 냄새가 빠져나가길 기다린 다음에 마시는 수밖에 없어요. 칵테일로 만들기에는 이 말도 안 되는 좋은 향이 아깝게 느껴집니다. 그러니 그저 아, 나는 지금 사건을 추리하고 있는 한물 간 탐정이구나, 하고 주인공에 빙의해보도록 합니다. 그러면 한두 잔은 그럭저럭 좋습니다.
위스키라고 하면 보통 100% 보리를 증류한 싱글몰트 위스키를 떠올리며 비싸다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요걸 스코틀랜드에서 만들면 스카치라고 부릅니다). 가격이 상당하죠. 이런 걸 거친 탐정이 마실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추리의 미궁에 빠져 허우적대다 벽장을 뒤져 찾는 위스키는 고급스러우면 안 되는 거죠, 암요.
국내에서도 가장 흔하게 살 수 있는 버번 브랜드로는 짐빔이 있습니다. 대형 마트에서도 파는데, 저렴하다고 하기에는 값이 좀 아쉬워요(750밀리리터에 3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던 듯합니다). 그럴 때는 면세 찬스를 써야 합니다. 1리터 들이 한 병을 20달러 안팎으로 살 수 있거든요. 남대문시장도 값이 꽤 저렴하다고 합니다.
찰스 부코스키의 편지에서 글쓰기에 관한 부분만 모아 편집한 <글쓰기에 대하여>에 실린 부코스키의 그림.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 쓰는 사람을 보면 질투가 납니다.
책과 술
미국에서 가장 많이 도난당한 책 <호밀빵 햄 샌드위치>를 쓴 찰스 부코스키는 알아주는 애주가였습니다. <글쓰기에 대하여>를 읽다 보면,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한 듯한 기분이 들죠. 출판사 편집자가 자기 글에 오타가 너무 많다고 투덜댔다는데, 부코스키는 그걸 당연하다고 얘기합니다. 술에 취하지 않고 글을 쓴 적이 없어서 그렇다나요!
나는 여기 와서 동봉하는 시에서 형편없는 행 서너 줄을 꺼내느라 또다시 직장에서 나왔고, 지금은(맥주를 병으로) 열한 병 마시고 취해서 지껄이고 있습니다. 하하, 어디까지 했더라요? -찰스 부코스키, <글쓰기에 대하여> 중
술에는 디오니소스적인, 그러니까 파괴적이면서도 창조적인 힘이 있는 듯합니다. 글 쓰는 사람들-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테네시 윌리엄스, 존 베리먼, 존 치버, 레이먼드 카버, 찰스 부코스키 등등-은 술의 유혹에 매일 허덕였죠. 쓰기 위해 취하고, 쓰지 못해 취하고, 쓰니까 취하는 이 반복적인 광기가 그들을 지탱하는 힘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쉽게 빨리 취하는 저는 335밀리리터짜리 작은 캔에 든 맥주만 마셔도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애주가인 척하며 술에 대해 술술 얘기하더니, 갑자기 태세를 전환했습니다). 분명 몇 글자 읽다 말고 잠들어버릴 테니까요. 잠 오는 것(책) 더하기 잠 오는 것(술)의 강력한 힘이란!
작년 말에 접어두었던 파일 폴더를 열고, 다시 한동안을 글 쓰는 데 집중해보려 합니다. 지난달에 사업자로 등록하면서 준비할 게 많아졌는데 불안한 마음만 커져서 그저 손 놓고 신나게 놀아봤어요. 열흘을 그렇게 흘려보내고 나니 이제 다시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을 듯합니다(그러기 위해 찰스 부코스키를 꺼냈고, 그의 글에서 쏟아내는 술 얘기에 마시지 않고도 매일 취해 있는 기분은 덤이었죠). 술을 마시지 못하는 대신, 무알코올 맥주를 쟁이고 오렌지와 파나마 게이샤 커피를 주문해두었습니다. 한동안은 못 마실 술을 위해 건배!
아무런 의무감을 가지지 않아도 될 일에 열을 올리고 있는 스스로를 열렬히 응원하는, 달콤하고 알싸한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