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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안후라이안 Jul 25. 2020

그 옛날 출생의 비밀들

페미니즘 말고 피메일리즘 3

나는 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경건을 다하는 일이 바로 신들의 마음을 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싸움을 시작해봅시다.

여성과 남성이 서로의 필요를 부정하려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요. 그리스 로마 신화를 펼칩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최초의 탄생은 여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대지와 창조의 신, 만물과 신들의 어머니 가이아는 하늘 신 우라노스와 산맥 신 우레아와 바다 신 폰토스를 '홀로' 낳습니다. 태초의 혼돈에서 번식을 위해 태어난 신의 성별이 여성이네요. 여성이 1승을 거머쥡니다.


<비너스(아프로디테)의 탄생(The Birth of Venus)>,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icelli), 1485년, 우피치미술관


가이아는 아들 우라노스와 폰토스를 남편으로 맞이한 이후에 다시 신들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됩니다. 가이아에게 우라노스는 말 안 듣는 나쁜 남편입니다. 두 사람이 낳은 아이들 중 이마 한가운데 둥근 눈 하나만을 가진 삼 형제 키클로페스와 50개의 머리와 100개의 팔이 달린 거인 삼 형제인 헤카톤케레이스를 타르타로스(공포스러운 처벌 공간)에 가둬버린 적이 있는데요. 이런 남편을 괘씸히 여긴 가이아는 아들 크로노스(나중에 제우스를 낳습니다)에게 거대한 낫을 주며 복수를 의뢰합니다. 그 낫은 아버지를 거세하는 데 쓰입니다(전편 '<남성을 버리려는 여성>에서 언급했던, 남아가 4~6세 사이에 갖게 된다는 거세에 대한 공포가 기억나시나요?). 이때 우라노스의 성기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이 가이아의 몸속에 들어가 세 신이 탄생하고요. 바다에 떨어진 우라노스의 남근 주변에 일어난 하얀 거품에서 사랑과 아름다움의 신 아프로디테가 탄생합니다(제우스와 디오네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습니다). 어머니 없는 탄생이네요. 남성도 1승을 차지합니다.


아버지를 쫓아낸 크로노스는 신들의 왕이 됩니다. 그는 아들에게 쫓겨나리라는, 아버지와 같은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아내 레아와의 사이에서 아이들이 태어나는 족족 산채로 삼켜버립니다. 아이를 모두 잃은 레아가 몰래 빼돌린 막내아들이 바로 제우스입니다. 그는 신탁에 따라 아버지 배 속에서 형제를 구해내고, 모든 신과 인간의 왕이 됩니다. 이때부터를 본격적인 역사의 시작이라고 봐도 좋겠습니다.


<이다산의 제우스와 헤라(Jupiter et Junon sur le  Mont Ida)>, 앙투안 쿠아펠(Antoine Coypel)>, 1699, 렌미술관


제우스는 남성을 중심으로 세운 질서의 상징입니다. 가부장제의 효시라고나 할까요. 여성의 역할과 필요를 감추기 위해, 제우스는 제 몸으로 직접 아이를 둘이나 낳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디오니소스는 포도나무와 포도주, 풍요와 황홀경의 신입니다. 그의 탄생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톺아볼 것은 인간 세멜레가 어머니인 이야기입니다. 바람피우는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세멜레의 유모로 변신한 헤라는, 제우스의 본모습을 알아내라고 속삭입니다. 인간인 세멜레가 밝음과 광채의 신인 제우스를 보면 타 죽을 게 뻔한 데도 말입니다. 세멜레가 제우스의 본모습을 보고 죽게 되고, 그가 가졌던 아이는 제우스의 허벅지에 꿰매어졌다 태어납니다. 이 역시 어머니 없는 탄생이네요. 남성이 2승을 거둡니다.


제우스의 몸에서 잉태한(?), 더 재미있는 탄생도 있습니다. 전쟁과 지혜의 신 아테나는 제우스의 첫 번째 아내 메티스와의 사이에서 생깁니다. 가이아의 신탁은, 계속해서 아이들을 경계하라는 식입니다. 이번에는, 만약 메티스가 딸을 낳으면 제우스와 대등한 능력을 가지게 될 테고, 아들을 낳으면 제우스를 몰아내고 왕이 된다는 예언이었습니다. 제우스는 두려워져, 임신한 메티스를 통째로 삼킵니다. 제우스의 몸에서 아테나는 자라고 자라, 끔찍한 두통을 유발합니다. 그는 대장장이 신 헤파이토스에게 머리를 쪼개 달라고 부탁합니다. 제우스의 머리를 열고  태어난 신이 바로 아테나입니다. 이제 3승, 남성의 압승이네요.


<제우스 머리에서 무장한 채 태어난 미네르바(아테나)>, 르네 앙투안 우아스, 17세기, 베르사유와 트리아농 궁


질투의 화신, 아니고 결혼생활의 수호신이자 제우스의 아내 헤라도 혼자서 신을 낳은 적이 있긴 합니다. 제우스가 혼자서 아테나를 낳자, 화가 난 헤라는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를 혼자 잉태했다고 하죠. 아니, 그럼 아테나가 태어날 때 제우스 머리를 뽀개 준 그 헤파이스토스는 누군가요? 신화가 여러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지며 나중에 보태지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긴 겁니다. 이제 여성에게 2승을 줘도 될까요? 아직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성 혼자 낳은 이 신은 너무나 작고 못생겨서 헤라에 의해 바다에 버려졌는데요(제우스에 의해 버려졌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절름발이까지 돼버렸으니까요.



우리나라에서는 아버지 없는 탄생이 오히려 익숙한 편입니다. 여성과 남성의 결합 대신 특이한 계기나 성스러운 물체의 정기를 받아 잉태하게 되었다는 감생 설화가 흔하거든요. <삼국유사> 기이 편에는 금와왕이 방에 가둔 유화가 햇빛을 받고 임신했다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유화가 낳은 알에서는 주몽이 태어납니다.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도 감생 설화의 주인공입니다. 가야산 여신 정견모주의 몸에 햇빛이 비쳐 수로왕(뇌질청예)과 그의 쌍둥이 형이자 대가야의 시조 뇌질주일을 잉태했다고 전해집니다. 오이복숭아를 먹고 임신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도 많습니다. 단군신화 이래, 우리나라 왕족은 남성 신과 인간 여성의 결합으로 탄생한 왕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지요.



우리는 신이 아니기에, 머리나 허벅지에 아이를 품고 있다 낳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런 비밀스러운 반쪽짜리 출생에도 여성과 남성의 상징이 도드라집니다. 우라노스의 남근이 떨어진 '바다'는 여성을 상징하고, 디오니소스와 아테나도 탄생 배경에는 각각의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헤파이스토스의 경우 어딘지 모르게 부족했고, 감생 설화에서 등장하는 햇빛, 오이, 복숭아는 모두 남성을 상징합니다. 신화를 통해 왕은 왕위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신성성을 그 당시에는 그럭저럭 획득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지우려 해도, 인간이 세대를 형성하고 오래도록 생명을 유지하려면 여성과 남성이 협력(요즘 우리는 이것을 때로 '사랑'이라고 부르는 듯합니다)해야만 하는 겁니다. 여성과 남성의 이번 싸움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었던 것이기에 무승부로 하겠습니다.





처음 인용문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아테나 출생 과정이 담긴 그림의 원제는 <Minerve naissant toute armee du cerveau de Jupiter>, 작가 이름은 Rene Antoine Houasse입니다. 사진 캡션 넣기에 부족해 따로 적습니다.


위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분석하는 방식은 사회학과 정신분석학과 분석심리학(특히 칼 융이 집중하는 집단 무의식의 원형을 신화에서 찾는 과정)에서 도출된 내용으로, 교양 과목인 '성과 문학' 수업시간에 적은 제 대학노트를 더듬어 끄집어낸 것입니다(수업 내용에는 각종 논문과 서적들이 포함되었던 듯합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가 꽤 많이 버무려져 있으니 유의해주세요. 융의 분석심리학에 관련된 내용은 또 이야기하겠습니다.


페미니즘과 피메일리즘을 다루는 이 글에, 라이킷을 눌러주시는 남성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여성'이라는 단어만 언급해도 불편하게 여기는 남성도 있으니까요. 공감해주시는 여성분들께도 감사드림은 물론이고요.


다음번에는 여성과 남성이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에 대해 고민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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