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이안후라이안 Jul 18. 2020

남성을 버리려는 여성

페미니즘 말고 피메일리즘 2


그 당시의 쓰라림을 기억하건대, 고정된 수입이 사람의 기질을 엄청나게 변화시킨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더군요. 이 세상의 어떤 무력도 내게서 500파운드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 나는 누구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니까요. 또 누구에게도 아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나에게 줄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앞선 글 <내가 언론고시를 포기한 이유>를 읽으며, '여성이 소수라는 건 말도 안 돼.' 이런 생각을 하셨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여기서 '소수'는 단순한 수치를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평범함을 유지하기 위해, 논란의 중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지를 감춤으로써 작아진 '목소리'의 부피와 질량을 뜻합니다. 아주 오랜 역사를 통해 정형화된 여성성의 이미지를 굴레처럼 쓰고 버티는 것만이, 여성을 평범하고 안전한 삶에 이르게 할 것처럼 우리(여성과 남성을 모두 포함)는 길들여졌기 때문이에요.


프로이트의 이론을 하나 끄집어내 볼까 합니다. 아이가 4~6세쯤이 되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여아는 남근을 선망하고 남아는 거세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고 합니다. 프로이트는 이를 본능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저는 오히려 사회화 과정에서 획득하게 된 프레임으로 봅니다. 그 나이쯤 되면 이미 아는 겁니다. 모든 자유와 권리가 남성에게 편향되어 있음을.


여성이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벗어나 자아를 실현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따릅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을 통해 얘기했죠.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아예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돈과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라고요. 위의 인용문도 <자기만의 방>에서 따온 겁니다.


마스다 미리는 30~40대 여성의 삶과 고민을 일러스트로 엮어 보여주는 일본 작가입니다. 특별할 것 없는 삶에서 일과 연애와 결혼과 육아를 고민하는 평범한 여성이라면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책 <내가 원하는 건 뭐지>에서, 마흔 살이 된 주인공은 남편에게 일하고 싶다고 얘기합니다. 남편도 공감해줍니다.

"집안일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한다면 적극 찬성이야."

이렇게 터무니없는 조건을 달아서요. 주인공은 씁쓸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남편의 조건을 따르자니,

"내 월급은 얼마 되지도 않을 거고. 집안일은 똑같이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없다. (거기다 어차피 사랑도 할 수 없고.)"

하고 체념하게 되는 주인공을 보면, 버지니아 울프의 견해가 매우 정확하단 생각이 듭니다.




너희들이 바라는 대로 생각하라. 너희들이 나에 대한 말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나는 너희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앞으로 누구인가 나 자신에 대해 설명을 해주면 그것이 아첨이든 용기를 일깨워 주는 것이든 그런 뻔뻔스러움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201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페터 한트케의 첫 아내 립가르트 슈바르츠는 연극배우입니다. 그는 결혼 전부터 몸에 담고 있던 예술혼을 불태우기 위해 그와 딸 아미나를 두고 떠나버립니다. 어떻게 보면 <왼손잡이 여인>은 한트케를 버린 아내를 이해하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릅니다.


소설에서 남편 부르노는 출장에서 돌아온 후, 오랜만에 재회한 아내에게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단 얘기를 합니다. 이 말이 발단이었을까요. 아내 '여인(아내의 이름이 언급되기는 하나, 소설에서 그를 언급할 때는 대부분 여인이라 합니다)'은 그를 놓아주기로 합니다. 짐을 싸서 집에서 내보낸 거죠. 그렇다고 해서 여인의 삶에 뚜렷한 변화가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결혼 전에 하던 번역 일감을 가져오고, 집을 정리하고, 아이를 돌보고, 번역을 맡긴 사장과 친구와 아버지와 남자(배우)를 만나고, 산책하는 게 전부입니다. 여인은 무엇을 바라는 걸까요? 자신의 자유로움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 배우가 사랑을 고백해도,

"제발 나를 생각에 넣고 어떤 계획을 세우지는 마세요."

하고 대답할밖에, 더는 없습니다.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한트케가 그를 떠난 아내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인은 절대 속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곁에 있는 모든 이들을 관찰하고, 똑같이 모든 이들의 관찰 대상이 될 뿐입니다.

"넌 너를 드러내지 않았어. 그리고 아무도 너를 비굴하게 하지는 않을 거야."

여인이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한 이야기만이 무언가를 짐작하게 합니다. 그 '무언가'는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통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여인은 남성을 버림으로써, 남편과 아이와 가정을 통해서만 표현되는 여성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겁니다.





앞서 급하게 발행한 한 편의 글을 두 편으로 쪼개어 발행합니다.


<왼손잡이 여인> 표지 옆에 있는 사진은 한트케와 아미나입니다. 아내에게 버림받고 남겨진 그는 아이를 혼자 키우며 <아이 이야기>를 쓰게 되지요. 한트케 이야기는 나중에 조금 더 다룰 수도 있습니다.


이 얘기가 이렇게 길어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결국에는 또 다음번까지 넘어가게 되었네요. 다음에는 신화에서 여성과 남성을 보여주는 방식에 대해 적어볼까 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언론고시를 포기한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