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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안후라이안 Aug 23. 2020

여성과 남성의 최초의 악수

페미니즘 말고 피메일리즘 5

- 여기서 다시 한번 '여성'과 '남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성'과 '남성성'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도록 하자. '중심을 회복하는 것'은 아주 고요해지는 것으로 여성성의 예술이다.

- 어머니가 자녀를 위한 운명을 짜려고 자기 자신의 운명을 짜는 행위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어머니가 스스로의 운명에 깊이 힘쓰는 것이 결국 자녀에게 도움이 된다.

- 여성이 진화하기 위해서는 무의식적 우세, 즉 남성적인 요소에 대해 복종적이던 태도를 버려야 한다.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한 학년에 한 학급씩만 있던 아주 작은 시골 학교. 곧 정년을 앞둔 선생님이 1학년 1반 아이들에게 공표했습니다.

"시험을 잘 본 학생들이 반장과 부반장을 맡기로 하자. 1등인 아이후는 여자니까, 2등이 반장을 하고 아이후는 부반장을 맡자. 반장은 일어서서 '차려, 경례!' 하고 인사해볼까?"

제가 사회에 나와 처음으로 여성으로서 차별받은 경험입니다. 여덟 살짜리 아이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죠. 그날 이후로 줄곧 여성이라는 조건은 감옥처럼 여겨졌습니다.



'여성스럽다'는 수식어는 늘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차분한 어투와 목소리, 첫째로서 갈고닦아 익숙한 배려, 의식하지 않은 몸짓이 그 많은 여성성의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벗어던지거나 훌훌 털어버리고 싶었어요.


중학생이 되자, 이발기(바리캉)가 필요할 만큼 머리를 짧게 잘랐습니다. 대학생이 되자 더욱 신이 났습니다. 6년 내내 입었던 치마 교복을 벗고 바지를 입을 수 있었으니까요. 스무 살 내내 바지만 입었습니다. 머리는 길렀지만 화장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기에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탈 코르셋 운동을 혼자서 척척 해나갔지만, 제가 여성스러움을 덜어내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스럽다'라는 말을 자주 듣거든요.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죠. 저는 위의 인용문처럼, 제 내면을 들여다보며 중심을 회복하기로 했습니다.



인용문은 로버트 A. 존슨의 <신화로 읽는 여성성 She>에서 가져왔습니다. 존슨은 칼 구스타브 융의 마지막 제자로 알려져 있는데요, 융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제자였죠. 이 세 정신분석학자는 인간의 원형을 들여다보기 위해 신화에 주목했습니다. 존슨은 <신화로 읽는 여성성 She>와 <신화로 읽는 남성성 He>를 통해 여성과 남성이 자신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어떻게 기르고 화해시켜야 하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존슨의 두 책은 여성과 남성이 자신의 내면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을 조화롭게 발달시키기 위한 여정을 소개합니다. 여성은, 사랑의 신인 에로스를 만나고 사랑을 완성해 신의 경지에 이르는 프시케의 과제를 수행하며 여성성을 완성합니다. 남성은, 성배를 찾아 떠나는 아서왕의 기사 파르시팔의 모험을 통해 남성성을 연마합니다. 융이 제안한 개념인 여성 속 남성성 '아니무스'와 남성 속 여성성 '아니마'의 균형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성과 남성은 두 권의 책을 모두 읽어야 하는 거죠.




- 만일 남성이 어머니 원형과 자기 어머니를 혼동하게 되면, 이 남성은 살아있는 자기 어머니가 자신을 위한 수호신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중략) 자기는 노력하지 않으면서 마치 세상이 자기에게 갚을 빚이라도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 남성에게 아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혼동은 어머니와 아내가 겹쳐지는 것이다. 이런 남성은 아내가 자기 동반자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며 요구할 것이다.

- 프랑스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미국 헌법이 첫머리를 통해 '행복 추구'라는 아주 잘못된 생각을 드러냈다고 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곧 행복과 멀어지게 하는 것이기에 아무도 행복을 추구할 수 없다. 정신의 구심점을 자기 외부의 더 큰 어떤 것으로 이동시키는 일을 하다 보면 행복은 저절로 주어진다.  




우리는 내면의 여성성과 남성성에서 균형점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어머니'로서만 이해하는 여성은 아이들이 성장해 독립하는 순간 죽음(상징적인 의미)을 맞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어머니들은 본인 스스로의 삶을 이끌고 나아가야만 합니다.


자신의 여성성을 개발하지 못한 남성은 다른 여성을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자신에게 잠재된 여러 여성성 중 왜곡된 형태의 여성성만을 받아들인다면, 그 남성은 어머니 콤플렉스에 빠지거나 어머니와 아내를 동일시하려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앞서 얘기했던 저의 탈 코르셋 경험도 이러한 오류 속에 빠져있었습니다. 책의 저자 존슨은 여성이 일을 하기 위해 아마존 부족(활을 잘 쏘기 위해 한쪽 가슴을 잘라낼 정도로 강인했던 모계 부족)이 되지는 않아도 된다는 조언을 해줍니다. 대신 내면의 남성성을 조금 더 잘 연마하라고 얘기합니다.


지금의 저는 머리도 기르고 다양한 길이의 치마도 입고 때로는 화장도 합니다. '여성스러움'을 추구하지 않기 위해 남성의 이미지(정형화되었을 뿐 실제 남성을 대변하지는 않는)를 복제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제 힘은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쪽으로 옮아갈 수 없는 성질이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요하고 깊은 내적 강인함을 기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제가 저의 여성성과 남성성을 화해시키고 중심을 회복한 방법입니다.



1세대 페미니즘은 정치 참여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미국의 경우 1870년에 흑인의 참정권이 인정되었고, 50여 년이 지난 1920년에야 여성도 참정권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우리나라는 광복 이후 1948년 총선부터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습니다).


2세대 페미니즘은 사회주의 운동과 결을 같이했습니다. 직장과 가정에서의 성평등을 추구했으며, 사회주의 운동이 그러했듯 과격하고 투쟁적인 방식으로 발전했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해 여성과 남성이 동시에 갖는 반감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된 듯합니다.


3세대 페미니즘은 다양한 인종과 계층과 성소수자(LGBTQ)의 평등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합니다. 피메일리즘 역시 2세대 페미니즘의 피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이며, 여성의 여성스러움을 부정하지 않는 태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여성에게 '여성스러움'을, 남성에게 '남자다움(우리는 보통 '남성스럽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을 강요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봅니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조직이 강하다."

루스벨트 토머스의 주장이 담긴, 그의 책 제목입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는 여성성을 무시하고 배척함으로 인해 오히려 병들게 되었습니다. 사회와 가정에서 여성이 느끼는 무력감과 남성이 느끼는 소외감과 피곤감이 그 증거입니다.


한 사람으로서의 여성과 남성이 자신의 여성성과 남성성을 조율해 중심을 세울 수 있다면, 사회 안에서의 여성성과 남성성도 균형을 맞추어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평등을 실현하려는 실천적 행동(action)은 중요합니다. 그전에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려는 노력이 수반된다면 이 행동이 과격한 방식을 취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더 좋은 쪽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새로운 의식의 탄생을 기원하며, <신화로 읽는 여성성 She>에서 인용문을 하나 더 가져와 아래에 덧붙입니다.



인간 심리를 탐구하면서 알게 된 아름다운 사실 중 하나는 의식이 성장하는 시기가 다가오면 낡은 길이나 오랜 관습은 새로운 탄생과 성장을 맞이하고 환영해준다는 것이다. 매 순간 해코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방식만이 새로운 의식을 태어나게 하는 바른 길인지 누가 알겠는가?






* 표지 사진은 프랑수아 제라르(Francois Gerard)의 1797년작 <프시케와 에로스(Psyché et l'Amour)> 입니다.


* 여성의 행동(action)을 추구하는 가장 획기적이고도 가능한 발전을 보여주는 영화도 있습니다. 톰 도나휴 감독의 <우먼 인 할리우드(This Changes Everything)>란 다큐멘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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