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이안후라이안 Dec 16. 2020

時代遺憾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간밤에 자려고 누웠다가 떠오르는 문장이 있어서 다시 벌떡 일어나 불을 켰습니다.

유희경의 시집 <<오늘 아침 단어>>에 실린,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입니다. 제목만 읽어도 질투가 납니다. 아니, 대체 이 사람은 티셔츠에 목을 넣는, 이런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 어떻게 이렇게 멋진 시를 낚아 올리는 걸까. 어째서 나는 매번 같은 문장에서 질투를 느끼는 걸까....


그러다가 이번에는 문득, 유감스러운 문장을 발견했지 뭐예요.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삼촌은
두꺼운 국어사전을 닮았다

베란다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면 안 되지요(아마 발코니를 베란다로 썼을 거라 생각됩니다만). 게다가 요즘 같은 세상에 삼촌이랑 같이 사는 집이 몇 집이나 될까요? 이 시가 발표된 때는 2008년. 지금으로부터 10년도 훨씬 더 지난 감성이네요.


가까운 몇 년간 이 시가 제게 이렇게 읽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너무도 평범하고 당연한, 그래서 씁쓸하고 떫은 매일을 얘기하는 시에 공감할 줄만 알았지요. 어쩌다 보니 세월을 허송했음을 불현듯 깨닫게 되는 날이 올 줄을 누가 알았겠어요, 맙소사!



티셔츠 목 부분을 정수리까지 끌어올리고는 그대로 다시 침대에 몸을 내던졌습니다. 덤덤한 온도와 익숙한 체취. 티셔츠 안은 비좁고, 저는 당신도 모르겠지만 저라는 사람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요즘 시대에 삼촌과 사는 조카는 거의 없을 것이며, 그 삼촌이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몰래가 아닌 이상에야) 피우는 일은 더더욱이 없겠습니다.


이렇게 때로는 시대에 유감하지만,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마다 몸에 닿는 이 익숙한 촉감과 어두움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며, 적잖이 안도하는 밤입니다.


아! 설마, 티셔츠가 옷의 역사에서 사라지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요?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유희경

1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벽 한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플라타너스 잎맥이 쪼그라드는 아침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 나는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면도를 하다가 그제 벤 자리를 또 베였고
아무리 닦아도 몸에선 털이 자란다
타일은 오래되면 사람의 색을 닮는구나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삼촌은
두꺼운 국어사전을 닮았다
얇은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뒷문이 지워졌다 당신, 찾아올 곳이 없다

3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간밤 당신 꿈을 꾼 덕분에
가슴 바깥으로 비죽이 간판이 하나 걸린다
때 절은 마룻바닥에선 목이 녹슨 머리를 박는 소리
당신을 한 벌의 수저와 묻는다
내가 토닥토닥 두들기는, 춥지 않은 무덤
먼지의 뒤꿈치들, 사각거린다


간밤, "먼지의 뒤꿈치들,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춥지 않은 밤을 꿈꾸고 아침에는 청소기도 돌렸습니다(허허).




* <시대유감>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제목이기도 합니다만, 딱히 이를 염두에 두지는 않고 정한 제목입니다.

* 우리가 흔히 아파트의 '베란다'라고 부르는 곳은 원래 '발코니'입니다.

* 간밤에 적어두고, 혹여 오글거리는 '새벽 갬성'일까 두려워 미처 발행하지 못했다가 이제야 열어둡니다. 아침에 눈뜨기 전에 꿈에서 MIKA의 <Dear Jealousy>를 흥얼거린 이유가 이 글에 있었나 봐요.

* 너무 오랜만에 적는 글이라 두서가 없지만 이해해주시리라 믿으며, 모두 잘 지내셨지요? :)

매거진의 이전글 누군가 나를 읽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