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손의 시작

2022년 7월 첫 기획안

by 방장

아빠와 점심 식사를 했다. 마음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새까만 피부, 자글자글한 주름과 퀭한 눈 아래로 짙은 다크서클.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고 아파 보이고 앙상해 보였다. 유교 사상에 가부장적 생각을 가진 아빠가 처음으로 내게 약한 소리를 하신다.

"아, 정말 여름에 일 못하겠어. 더워서 미치겠다. 입맛도 없고 속도 쓰리고."

진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멋 부리기를 좋아하는 아빠가 한순간에 초라해져 버린 것 같은 순간이었다. 아빠의 고생한 인생이야기를 풀어내자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것 같다. 부정적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물리적 환경에 노출된 아빠는 핸드폰으로 소설을 보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푼다.


5년 동안 다녔던 직장을 그만둔 지 40일쯤이었던 내가 금전적으로 아빠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너무 슬펐다. 내가 아빠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을 해봤다. 자주 안부 전화하기. 내가 무심한 딸인 건 인정한다. 이것으로 부족하다, 뭔가 더 근본적인 접근 방법이 없을까? 서둘러 아빠를 그만두게 하는 것부터 하고 싶었다. 그만두고 뭐 하지? 나랑 함께 뭐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그게 시작이었다.

그날 밤 작성한 첫 기획안이다.

뜬금없는 카페 기획안. (카페를 결정한 이유는 하나다. 아빠가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쉬워서, 일 평생 라면도 안 끓여본 아빠에게 갑자기 요리를 시킬 순 없으니 말이다. )


1. 카페 투자 비용: 설정목표 1억 이하 (1~1.4억)

* 임대료 150만 원 이하, 세금포함(200만 원)

* 권리금이 없거나 1000만 원 이하

* 보증금 3000만 원 이하

* 인테리어 비용(도구포함) 3000만 원 이하

* 바리스타 자격증 및 아빠 작업복 500만 원 이하

* 기타 (추가 공사 등) 1000만 원 이하

근자감으로 적었던 예산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2. 투자자

* 투자자: 아빠와 나의 퇴직금 + 대출 + 엄마의 도움

아빠가 일단 카페 하는 거 봐서 그만두기로 했다. 아빠의 선견지명을 리스펙 한다.


3. 구성인원

아빠: 지점장, 빙수, 가게 시설관리 담당(추후 바리스타 자격증 따기 시도)

나: 사장, 운영 관리 담당, 바리스타 자격증 따기

바리스타 파트타임 직원: 후보 1, 후보 2

나는 사장만 하고 싶었다. 너무 있어 보이니까.


4. 공사 관련 협력사(무료)

전기기사 배우자: 상임고문, 관리지원

골치 아픈 공사는 꼼꼼한 배우자가 알아서 하겠지...


5. 카페 레이아웃(구역별 용도만 설명)

카운터, 창고, 홀, 작업실 분리, (화장실) : 추후 확정

대충 방향잡이만 사장인 내가 하면 돼.


6. 카페 개성

* 커피

* 프로그램 운영 (교육, 문화 콘텐츠 만들고 운영하기)

어디서 보고 들은 건 있어서.


7. 장소 선정

해 들어오고, 정방향인 가게

위치: 문래동, 방배동, 구로디지털단지역 (APP 인구 밀집도 테스트 앱)

주의사항: 개별 냉난방 시스템(계량기 있는 여부 확인), 화장실 위치, 수도시설(온수포함/배수 등 확인), 전기용량(단위 KW) 확인

결국 부동산 중개인의 말에 홀라당 넘어가서... 계획에 없는 엉뚱한 지역으로 선정.


8. 인테리어(상담)

* 벽 컬러: 화이트-그레이 자연스럽고 고급스러운 톤, 아빠와 함께 페인트

* 전기, 수도 등: 배우자 작업

* 천장/간판: 배우자 친구 요청

* 조명: 타 카페 벤치마킹

* 소품: 타 카페 벤치마킹

* 음향: 타 카페 벤치마킹

아빠와 페인트 로망, 오감을 자극하면 좋다는 소리는 어디서 들어서... 결국 모든 공사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정답이다.


9. 가격 및 메뉴

메뉴: 타 카페 벤치마킹

가격: 타 카페 벤치마킹

커피원두: 테스트 후 선별

벤치마킹하면 참 좋았을 텐데... 하고 싶은 대로 시장에 없는 메뉴를 만들었다. 시장에 없는 메뉴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티 전문점 할 거면 원두를 저렴한 걸 쓰던지... 커피 머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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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재료비용 및 유통 루트

메뉴 선정 후 진행예정: 카페 창업 컨설팅 상담 신청

컨설팅 상담받고도 내 고집대로 밀고 간 근자감. 이 정도면 알아줘야 할 근자감이다.


11. 운영 프로그램

* 지원사업 알아보기: 청년 창업지원 등

* 프로그램 밴치마킹 후 선정(예, 독서모임, 스터디 룸 대여, 스피치 데이)

* 배달계약 (개업 후)

지원금은 빠른 포기를 했다. 누군가의 개입이 싫어서. 배달은 하지 않았다. 프로그램에 영향을 미칠 것 같아서. 조용한 카페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 정말 너무 조용해져 버린 카페...


12. 사업자

* 추가사업 가능 여부 확인(예, 출판사 또는 작업실 추가등록)

* 개업 후 보험 관련 알아보기(화재보험 등)

* 가게 CCTV

추가 사업보다... 하나에 집중하지 그랬어..


13. 홍보

* 인스타그램 활용

* 블로그

* 기타

홍보는... 참 어렵다. 프로그램만 잘 만들면 사람들이 알아서 모일 것이라 생각했다.


제발 여기서 멈춰줘,

2022년의 똥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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