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직 이직 후 3개월만에 다시 퇴사를 선택했다
스타트업을 퇴사했다. 채 3개월이 되기도 전에.
1:29:300
내가 좋아하는 법칙중에 '하인리히' 법칙이 있다. 1건의 대형사고가 나기전에는 29건의 크고 작은 사고가 있고, 그 전에는 300여개의 징조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미국의 보험회사 직원 하인리히가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까 나에게도 300개, 29개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것들이 모여 퇴사라는 1개의 사건으로 터져버렸다.
브랜딩부터 vs 전환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던 것은 사수가 내게 기대하는것과 내가 잘하는 것이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이전 회사에서 컨텐츠로 이슈를 창출하고, 그에 따라 매출을 증대하는 마케팅을 해왔다. 그런데 이 회사에선 나에게 오직 전환만을 요구했다. 물론 나도 전환이 중요하다는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컨텐츠 마케팅은 퍼포먼스 마케팅과 다르다. 중요도도 다르고 접근도 다를 수 밖에 없다. 컨텐츠마케팅은 고객과의 관계형성이 중요하다. 그리고 관계형성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어느 누가 관계도 쌓지 않은 채 물건부터 팔라고 하면 좋아할까? 상업성을 배제하고 먼저 관계쌓기부터 들어가야 한다는 나와, 그럼 전환은 언제 이룰거냐는 선임의 대립. 결국 그 간극을 좁히지 못했다.
서류없음, 결재라인 없음
커뮤니케이션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를테면 이전 회사에선 팀 내에서의 의사소통은 주로 대면을 통해서 했다. 메신저나 메일로 전달할 때도 있었지만, 중요한 얘기는 다시 한번 사람의 얼굴을 보고 상기시키곤 했다. 그러나 여기선 바로 옆자리에 있으면서도 슬랙이라는 메신저로 소통했다. 슬랙으로 메시지를 보내고나면 그게 끝이었다. 보고체계가 확실치 않은 것도 커뮤니케이션의 미스를 만들었다. 팀장-임원으로 올라가는 결재라인이 따로 없었기에 내가 선임에게만 보고해도 되는지, 임원진까지 보고해야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서류와 결재라인이 없다는건 스타트업만의 자유로움이었지만 경력직에게는 낯섦이었고 적응에 어려움을 주는 요소였다.
내 인생의 다시는 스타트업은 없다
나는 원래 좀 그런편이다. 궁금한건 해봐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이번 스타트업 경험에도 후회는 없다. 그렇지만 다시는 스타트업에는 지원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느낀 스타트업의 가장 큰 단점은 "직무적으로 나보다 경험이 없는 사람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회사에 입사하면 보통 팀장을 비롯 나보다 직무경험과 능력이 높은 이들과 일하게 된다. 경력이 쌓여도 여전히 내게는 경험을 통해 조언을 해줄 과장, 차장, 부장이 있다. 그러나 스타트업은 그런게 없다. 나보다 경험이 많은 사람은 없는데, 심지어 나보다 경험이 적은 이가 나의 선임이며 그가 나를 평가한다.
처음에는 이게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어느정도 경험이 쌓였고 머리도 굵어졌으니 윗 사람의 간섭없이 내가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겠구나.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나보다 경력이 많은 사람의 평가를 받는게 차라리 낫지, 나보다 경력이 적은 사람의 평가를 받게 될 줄이야... 스타트업에 오래있었다는 이유로 그는 나의 선임이 되고, 사수가 된다. 심지어 나보다 경력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회사도 나에게 느끼는 불만이 있었을것이다.
그리고 이번 퇴사는 그런 연장선상에서 서로 합의에 의한 선택이었다. 첫달은 정말 좋았고, 둘째달은 너무 힘들었던 나의 스타트업 경험기. 한번의 실패를 겪고나니 오히려 뭔가 더 선명해진 기분이다. 나에 대해 잘 알고, 회사에 대해 잘 알아볼 것. 이래저래 다시 또 퇴사를 한다. 처음엔 답답했고 그 다음엔 울적했다. 하지만 지금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너무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