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테로요.
누가 좋아하는 화가가 누구냐고 물으면(매우 드문 경우였지만) 그렇게 대답하곤 했다. 보테로요.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재미있잖아요' 라고 대답했다. 사실 그랬다. 미술에 문외한인 내가 의지할것은 그런식의 즉각적인 반응 뿐이었다. 대학시절 무지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컸다. 그래서 1년씩 주제를 잡고 책을 탐독하곤했다.. 1년은 한국문학, 1년은 음악, 1년은 미술... 이런식이었다. 그때 만났던 화가중에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이는 두명이었다. 하나는 유에민준, 그리고 또 하나는 보테로였다.
그러니까 극장을 찾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보테로에 대한 영화라니! 보테로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라니!
이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보테로의 초기작부터 현재까지의 작품활동을 보여주면서 '어떻게 예술가는 독보적인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는가' 를 보여준다는데 있다. 완성된 그림, 훌륭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는건 이제 다들 인정하지. 그런데 정말 궁금한건 이 화가가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되었느냐, 이거잖아. 영감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과정으로 성장해왔는지. 이 영화에는 그 과정이 담겨있다. 그래서 보테로를 사랑하는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는 더할나위없이 만족스러웠다.
- 그림을 사랑해서 그리기 시작
(남과 비슷한 형태로, 남다르지 않은 시작으로)
- 좋아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재해석하기 시작
- 서서히 자신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발견하기 시작
- 관찰하고 경험하면서 영감을 받는 소재를 개발
- 자신의 스타일 + 주제의식을 발현
-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스타일의 예술세계 완성
영화를 보며 알게된 보테로에 대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 그가 영향받은 화가는 프란체스카 이다.
- 어느날 악기를 그리다가 특유의 풍성한 그림체를 발견하게 된다.
- 초창기에는 유명화가들의 작품을 자신의 그림체로 변형해서 그리는것에 몰두했다.
(-> MOMA 큐레이터 눈에 들기 시작함)
- 사고로 잃은 아들 페드리토를 그린 연작이 있다.
- 보테로는 서커스와 투우에 매료됐다.
- 메데인에 있는 보테로 박물관에는 그가 기증한 그의 그림, 그리고 그가 구매한 인상파화가들의 그림이 전시되어있다.
나는 뚱뚱한 사람들을 그리는게 아니에요.
사물이나 인물이 가지는
풍성함과 관능미를 그립니다.
현실은 너무 메말라있잖아요.
왜 뚱뚱한 사람들만 그리세요? 아마도 수백번도 더 들었을 그 질문에 보테로는 이렇게 답한다. 자신은 뚱뚱함을 그리는게 아니고, 사물과 인물에 내포되어있는 풍성함과 관능을 그리는 것이라고. 영화 말미에 나오는 그의 조각상을 보노라면 그말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아니 만약 그 이유가 아니라도 충분하다. 그가 예술가인 이유는, 세상에 그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그 이전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니까.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만으로 보테로라는 예술가의 가치는 이미 입증된 것일테니까.
누군가 내게 좋아하는 화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여전히 "보테로요"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그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보테로 하나밖에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