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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퐝메리 Oct 18. 2020

아이돌을 좋아하던 그 아이는

빠순이는 자라서 무엇이 되는가



대리님 000 경호실장분 연락처예요


인생은 정말 웃기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구나. 1년 전 구 회사의 모델이었던 아이돌 팬사인회를 준비하면서 든 생각이다. 10대 때 나는 소위 아이돌을 좋아하던 빠순이였다. 모 그룹의 숙소에도 가보고, 공개방송에도 가보고. 팬사인회나 공개방송에서 만나는 경호원들이 어찌나 원망스럽던지. 아니 왜 못 가게 해? 왜 앞을 막아! 안 보인다고!!! 악다구니를 쓰며 억울한 소리를 내뱉는 10대 소녀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이렇게 자라... 이제는 경호인력들과 아이돌 스타의 입장동선을 맞춰보고 있었다. '예 실장님 000 입장동선 하고 경호인력 배치표 좀 메일로 보내주시겠어요?'


일이니 하는 것이었지만 정말 속으로는 내 자신이 웃기다고 생각했다.



'혹시 아시나요, 당신들이 그렇게 무시하며
한심하게 쳐다보던 빠순이가 바로 나예요.'


경호실장과 전화통화를 하고 메일을 주고받을 때마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경호실장뿐이 아니었다. 소속사 대표와 광고 계약을 논의할 때. 광고 촬영장에서 매니저와 인사할 때. 아이돌을 위해 일하는 스태프들과 마주치는 모든 접점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 참... 내가 10대 때만 해도 이런 사람들하고 같이 '일'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는데.






요즘에는 운전을 하면서 내가 좋아했던 아이돌의 그때 그 시절 음악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이상하다. 음악은 힘이 세서 그때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담임한테 야자 빼 달라고, 교무실 가서 사정사정하던 그 아이가... 이제는 어른이 돼서 운전을 하면서 그때를 추억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 노래, 집 앞 계단에서 CDP로 주구장창 들었었는데. 아니 이 노래는 여의도에서 공방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들었던 곡이잖아.


언젠가 친구랑도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 친구도 자신이 중고등학생때 좋아하던 아이돌 노래를 차를 타고 가며 들을 때 기분이 묘하다고 했다. 그러게 말이야. 그때랑 지금이랑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제는 운전을 하고, 연예인과 일적으로 아는 사이가 되고. 응응 그러게 말이야. 오래 살고 볼일이라니까 진짜.


어른들의 망언과 염려에도 불구하고, 아이돌을 좋아하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살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좋아하는 마음도 사그라들고, 인생의 전부에서 일부로 밀려나게 된다는 걸. 이제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한때의 열정마저 없었다면 10대의 삶은 얼마나 퍽퍽했을까.


인생의 전부가 아이돌이던 시절을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백번이고 그 아이돌을 사랑할 것이다. 어른들이 해야 하는 일은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언젠가는 나처럼, 내 친구처럼 제 몫을 다하는 어른으로 자랄 테니까. 아이돌을 좋아하는 그 아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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