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싱

Fantasma 233번째 이야기, 펜싱

by 석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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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더 새하얗던 도복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마치 당연한 수순을 밟듯이 그 맑은 색의 도복에 매료되었고, 피스트 위에서 움직이는 발걸음을 보았을 때는 이미 빠져나오기 힘들 정도로 펜싱에 중독되어있었다. 펜싱장에 가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점점 더 일상에 치이고, 펜싱장보다 핸드볼장을 찾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어느새 나에게 있어서 절대 우위를 점했던 펜싱은 조금씩 옆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펜싱장에 들어서면 반가운 미소로 맞아주곤 하던 이들을 생각하면 줄어든 발걸음이 미안하고 또 미안해진다. 그래도 최소한 일 년에 두 대회 이상은 펜싱장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한창 펜싱을 보러 다니던 때 나는 부산에서 양구까지 왕복 12시간을 달려 그들을 보았고, 시외버스를 3번이나 갈아타고도 경기장으로 향했었다. 아주 초창기에는 사인 한 장을 받으러 서울로 달려갔던 때도 있었고, 매번 해외에서 생일을 맞이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 미리 생일을 챙겨주러 태릉으로 간 적도 있었다.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기억들이 있지만 일일이 열거하기에는 끝도 없으리라. 오랜만에 찾은 펜싱장은 경기장을 빼곡히 채운 선수들의 함성소리로 여전히 넘실거리고 있었다. 마음이 쿵쾅거렸다. 피스트 위에서 움직이는 발들을 보자 잠들어있던 세포가 깨어나는 것 같았다. 왜 잊고 살았을까, 이 느낌을. 약간의 긴장감과 포근함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금 펜싱에 각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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