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링 다이어리 5 - 베트남 사덱(Sa Dec)
사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표는 나짱도 호치민도 아닌 ‘사덱’이었다. 생소할 수도 있는 이름의 작은 소도시 사덱. 전날 미리 예약해둔 풍짱 버스를 타고 사덱으로의 짧은 여정에 올랐다. 밤의 슬리핑 버스와는 색다른 느낌의 풍짱. 밤에 슬리핑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는 간이 휴게소 같은 곳들만 들렀는데, 낮에 이동하니 간이가 아닌 제대로 갖춰진 휴게소에 들러서 괜히 신기했다. 풍짱 버스 전용 휴게소인지는 몰라도 휴게소 이름부터가 풍짱이었다. 버스도 그에 걸맞게 풍짱만 계속 왔다 갔다 했고. 휴게소에 도착해서 내리려는데, 버스 승무원이 나를 흘낏 보더니 버스 번호를 가리켰다. 내가 제시간에 다시 버스에 탑승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만 사덱행 버스에서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나는 그의 귀여운 친절에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휴게소답게 먹거리가 참 많았는데 사덱가서 본격적인 식사를 할 요량으로 간단히 소시지를 먹었다. 한국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맛의 소시지라고 생각했는데, 소스가 무척이나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하나 더 먹을 걸. 버스 탑승 시간이 다돼서 소시지에 대한 미련을 접어두고 버스에 올랐다. 사람들이 하나 둘 버스에 타고, 승무원도 버스 기사와 함께 탑승했다. 탑승하지 않은 사람이 있나 살펴보던 승무원이 나를 보더니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버스 번호를 알려줬음에도 내가 타지 못할까 계속 걱정했나 보다.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잘 탈 수 있었어요.
한참 사덱을 향해서 달려가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 때문일까. 사덱이 가까워질수록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버스 안에서 나는 내내 길가를 촉촉이 적시는 비를 바라보며,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그녀가 사랑했던 중국인 남자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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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어느덧 사덱에 닿고, 빗줄기도 점차 약해져서 오는 듯 마는 듯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버스에서 내려 내가 갈 장소인 중국인 남자의 집 위치를 확인했다. <연인>의 실제 배경이자 영화 <연인>의 촬영 장소로 알려진 그곳. 구글 지도를 보니 충분히 걸어서 갈 만한 거리였다. 그래서 오토바이를 타지 않고 걷기로 했다. 걷다 보니 메콩강이 눈에 들어왔다. 메콩강을 보니 마음이 두근거렸다. 내가 지금 사덱에 왔구나가 새삼 실감 났다.
반쯤 걸었을까. 목마름에 코코넛을 마시고 다시 이동하기로 했다. 근데 이놈의 코코넛 양이 어찌나 많은지 당최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앉아 코코넛을 마시다가 시간이 빡빡할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코코넛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깨끗하게 클리어하고.
코코넛의 힘을 빌려 걷다 보니 중국인 남자의 집에 금세 도착했다. 중국인 남자의 집만 덩그러니 예전 건축물의 형태로 현대식 건물들 사이에 끼어있었다. 그 부조화가 어찌나 오묘하게 느껴지던지.
그의 집은 박물관처럼 운영되고 있었다. 입장권을 끊고, 두리번거리는데 매표원이 나를 보며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니까 한국 가수 이야기를 했다. 한류 열풍이 새삼 대단하다 느껴졌다. 사덱까지 몰아치고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박물관처럼 운영되고 있는 것 치고는 별달리 크게 구경할만한 요소는 없었다. 그래도 나는 만족스러웠다. 벽면에 걸린 그와 뒤라스의 실제 사진과 영화 스틸 컷 만으로도 너무너무 설레었으니까. 내가 가장 주목한 공간은 침실이었다. 침실은 그들의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기에. 두 군데의 침실이 있었는데 왼편의 침실이 왠지 그들이 머물렀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적당한 바람과 햇살이 방금 막 사랑을 나눈 그들에게 따스하게 손짓했을 것 같았기에. 아마도 그들은 이 침실에서 사랑을 나누고, 사랑을 말하며, 서로를 끝없이 갈망했겠지.
집의 중심에는 커다란 테이블 같은 게 있었는데,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식사를 하기에는 너무 낮고, 그렇다고 물건을 두기에도 낮은 높이의 테이블이었다. 내가 베트남어를 능숙하게 할 줄 안다면 저 테이블의 정체가 무엇인지 직원에게 물어볼 텐데. 부족한 외국어 실력에 대한 답답함이 몰려들었다.
한참 테이블의 용도에 대해 고민하다 집의 뒤편으로 나왔더니, 서로 마주 보는 형태의 그네 형식의 나무의자가 있었다. 그들이 살던 시절에도 이 그네가 있었을까. 만약 있었다면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그네를 탔을까.
집의 옆쪽으로 가니 똑같은 형태의 그네가 또 있었다. 그네에 앉으면 왼편에 위치한 창문들을 바로 옆에서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살포시 그네에 앉아서 침실 쪽으로 열려있는 창문을 바라보는데, 마치 침대 위에 그들이 누워있기라도 한 것처럼 몰래 관음 하는 기분이 들었다. 정작 열린 창문으로는 휑한 하얀 시트만 보일 뿐인데도 말이다.
그렇게 그의 집을 한 바퀴 돌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 공간을 눈에 담기 위해 벽면의 사진들을 뚫어져라 바라보곤 밖으로 나왔다.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진흙에라도 빠진 듯 잘 떨어지지 않아서 그의 집 건너편에 위치한 메콩강을 보며 지나다니는 배들을 계속 구경했다. 자신을 두고 떠나는 뒤라스를 보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의 어리디 어린 연인을 잊지 못하고 집 앞 메콩강변에서 쓸쓸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지는 않았을까. 이 강물이 어쩌면 그에게는 어린 연인을 떠올리게 하는 하나의 촉매제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