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링 다이어리 7 - 베트남 호치민(Ho Chi Minh)
달이 휘영청 밝던 밤을 지나 다시 아침이 왔다. 어느덧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내일 새벽이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한다. 여행의 끝이 성큼 다가왔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이제야 이 공기, 이 소음에 적응이 됐는데 말이다. 비록 마지막 날이지만 급하게 움직이기는 싫었다. 그렇기에 느긋하게 숙소에서 뒹굴 거리다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갔다.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쌀국수를 먹으며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게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저녁때 현지인 언니와 식사 약속이 있었던지라 시간은 여유로웠다. 우선, 숙소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콩 카페에 가기로 했다. 쓰다만 원고를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숙소 근처의 콩 카페는 시내 라인에 있던 콩 카페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바깥 인테리어는 비슷했지만, 내부가 살짝 달랐다. 음료를 시키고 노트북을 펼쳐 드니 창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 내리는 창밖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나도 모르게 최면이라도 걸린 듯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 풍경마저도 그립게 느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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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카페에서 앉아 원고를 마무리 짓고, 노트북을 두기 위해 숙소에 잠시 들렀다.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았기에 며칠 전 언니들이 추천해준 트리북스라는 서점에 갈 계획이었다. 책과 키링과 여러 가지를 파는 멀티형 서점. 익숙한 손짓으로 그랩을 켜고 오토바이를 불렀다.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시원한 바람을 만끽할 때쯤, 트리북스에 도착했다.
트리북스는 내 생각보다 더 좋았다. 취향저격이었다. 내부 인테리어도 마음에 들었고, 영화 포스터들을 그림으로 그려서 판매하는 포스터와 영화 아트 컵받침, 영화 아트 엽서 등등 영화를 좋아하는 내 마음에 불을 질렀다. 서점거리의 서점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고 하면 설명이 되려나. 눈길을 사로잡는 물품들이 많아서 한참 동안 넋을 놓고 구경했다. 사고 싶은 게 너무 많았지만, 고심하다 영화 아트 엽서와 컵받침과 오토바이 모양의 키링을 샀다. 이번 여행에서 날 매료시켰던 오토바이를 키링으로나마 남겨두고 싶었기에.
트리북스에서 취향저격당하고 있는 사이, 해가 저물어가기 시작했다. 약속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걸어가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 오토바이를 탔는데 몇 분 되지 않아서 목적지에 닿았다. 역시 바퀴를 타니 금방이다. 요금을 지불하려고 돈을 꺼냈는데 오토바이 청년의 표정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잔돈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식당 주변에는 잔돈을 바꿀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청년은 내가 내민 지폐를 들고 주변을 서성이다가 다시 나에게 지폐를 내밀었다. 잔돈이 없으니, 그냥 받은 셈 친다는 손짓으로. 정말 그래도 되나 싶어서 내가 망설이고 있는데 청년이 괜찮다며 손을 흔들고 가버렸다. 오토바이 키링의 효과일까? 얼마 안 되는 요금이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청년의 친절함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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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의 마지막 식사. 근사해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오랜만에 만난 언니와 함께 수다를 떨며 식사를 했다. 한국어에 능숙한 언니 덕택에 서로 한국어로 대화를 쏟아내고 있으니, 순간 이곳이 한국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내게 베트남이 어땠냐고 물었고, 나는 싱긋 웃으며 다음에 또 오고 싶다고 대답했다.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화살처럼 날아갔으니까. 반가운 사람과의 만남들은 여행의 감칠맛을 더해주었고.
역시, 여행은 사람이다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짧은 일정 탓에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도 많았기에 다음번에 다시 올 이유는 충분했다. 그렇게 봄의 중간에서 만난 베트남은 여름처럼 뜨겁고 강렬하게 내 세포들을 움직였다. 아마도, 한동안 나는 베트남을 그리워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