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링 다이어리 8 - 제주도(Jeju Island)
“제주도 갈래?”
베트남에서 돌아와 노곤한 몸을 이끌고 한창 빨래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전화의 주인공은 제주도에서 생활할 때 친해져서 육지에서도 종종 만났던 두부 오빠였다. 근래에는 연락할 일이 딱히 없어서 나나 두부 오빠나 둘 다 뜸했었는데, 대뜸 전화 와서는 제주도를 가자니. 순간 당황했다. 아직 여행의 여독이 한창 쌓여있는 상태인지라, 뒷머리를 긁적이며 확답을 하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제주에 간지 오래돼서 가고 싶기는 한데 이건 너무 갑작스럽다. 그렇지만 조만간 제주를 갈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일행이 있을 때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갈게.”
갈까 말까 고민이 될 때는 가는 게 맞다는 말이 떠올랐다. 잠시간의 짧은 고민을 끝내고 가겠다고 대답했다. 두부 오빠도 본지 오래됐고, 제주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오래간만에 볼 겸 가기로 했다. 내일 당장 출발하는 비행기 표를 살펴보다 저녁에 출발하는 걸로 끊었다. 도저히 오전에는 출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무도 피곤했기에. 조금이라도 여독을 풀고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저녁 출발 비행기를 예매했다. 빨래하다 말고 제주도행 티켓팅이라니. 상황이 참 웃겼지만, 당분간 끊길 줄 알았던 여행이 다시금 이어진다는 생각에 얼굴 가득 기쁨이 차올랐다.
*
부쩍 더워진 날씨 덕에 빨래가 금세 말랐다. 캐리어에 옷들을 대충 접어 넣고 빠진 짐들이 없나 체크를 하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육지가 이렇게 날씨가 좋으니, 제주도는 더 좋겠다 싶어서 날씨 어플을 켰는데 이게 웬걸. 4박 5일간의 일정 중에 하루를 제외하고는 내내 비가 온단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그러나 제주도 날씨는 시시각각으로 바뀌곤 했기에, 비가 온다고 해놓고 안 올 수도 있겠다 싶어서 날씨 어플을 완전히 맹신하지는 않기로 했다.
공항에 도착해 캐리어를 먼저 보내고, 노트북을 켰다. 제주에 가기 전에 베트남에서 써놓은 원고를 한 편 올리고 갈 생각이었다. 가서 낮에는 원고를 쓰고, 밤에는 사람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는 게 궁극적인 계획이었지만 날씨만큼이나 계획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섬이라는 걸 잘 알기에 원고라도 미리 올려놔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
제주에 도착하니, 뉘엿뉘엿 해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퇴근을 알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제주도 노을에 반가움이 앞섰다. 노을 지는 풍경만으로도 이렇게 반갑다니. 정말 오랜만에 이곳에 오긴 왔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 풍경 사이에서 먼저 제주에 도착해있던 두부 오빠가 손을 흔들었다. 아마 나 혼자 왔다면 숙소까지 여러 번 버스를 갈아타고 가야 했을 테다. 흔쾌히 데리러 와준 두부 오빠에게 고마움이 들었다.
*
숙소에 도착하니 해가 완전히 집으로 들어가 버려서 주변이 온통 새까맸다. 오늘의 숙소는 내가 한창 제주도에서 생활할 때 스텝으로 몇 달간 머물렀던 욜 게스트 하우스. 중산간에 위치한 풍경이 좋은 게스트 하우스다. 욜의 사장님인 동현이 오빠가 오랜만이라며 특유의 말투로 반겨주었다.
금요일 밤이라 게스트가 꽤 있을 줄 알았는데, 비수기라서 그런지 우리를 제외하고는 두 명의 게스트밖에는 없었다. 인원이 조촐한 만큼 간단히 술자리가 벌어졌다. 치킨을 주 베이스로 한 치쏘파티. 제주 막걸리를 애정 하는 두부 오빠는 막걸리를 마시고, 나를 비롯한 나머지 인원들은 소주잔을 들었다. 통성명을 하고, 잔을 부딪히는데 남자애 한 명이 나랑 동갑이었다. 그래서 곧장 나는 “반갑다 친구야!”를 날렸고, 그 애는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이내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다른 게스트 한 명은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였는데, 한 살차 정도는 사회에 나오면 별 차이도 없으니 친구를 먹기로 했다.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육지였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테지만, 제주도는 여행지이기에 모두가 오픈 마인드가 된다. 그렇기에 나이차를 뛰어넘는 우정도 여기서는 흔한 일이다. 모두가 친구가 되는 마법 속에 제주에서의 첫 날밤이 무르익어갔다. 어두운 중산간을 우리의 웃음소리로 환하게 밝히며.